사람의 씨앗 전호근 교수

책 제목 ‘사람의 씨앗’은 공자가 평생을 통틀어 가장 자주 말했던 ‘인(仁)’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자 맹자의 ‘측은지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맹자는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안타까운 상황을 목도하면 그 사람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일단 아이를 불쌍히 여기고 가슴 아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저자는 측은지심을 인간의 조건으로 보는데, 그 마음을 맹자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삶에서 배웠노라고 말한다. 책에는 옛사람의 책에서 배운 바가 적지 않게 녹아 있지만 저자 스스로 말하듯 그의 삶의 궤도를 조금씩 수정하게 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로 꽉 차 있다. 서울역 앞에서 노숙인에게 과자를 건네던 어린아이, 커피를 타주면서 돈을 받을 수 없다던 할머니, 불길을 뚫고 장애인을 구출해낸 세 청년의 이야기 등은 우리가 놓쳐버린 삶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고, 삶에서 소중히 여겨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되묻게 한다.
“책의 내용은 옛사람의 책을 읽고 배운 바를 기록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났던 사람들로부터 배운 이야기다. 본디 독자를 염두에 두고 썼다기보다 나의 비망을 위한 기록으로, 거창한 이야기나 특별한 경험담이 없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흔하고 사소한 이야기들이다. 그런 사소한 일들이 내 삶의 궤도를 조금씩 수정하게 했고 이 책은 그런 궤적을 기록한 것이다.”
— 「들어가며」 중에서

“후한 시대의 『설문해자』라는 책에는 千(천) 자가 위에 있고 心(심) 자가 아래에 있는 모양으로 ‘인(仁)’을 표기하고 있다. 천(千)은 천 명의 사람이란 뜻이니 곧 인은 천 사람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때의 千(천)은 산술적인 수효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천 명이면 천 명이, 만 명이면 만 명이 모두 가지고 있는 마음이니 이런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인(仁)은 사람의 씨앗이다.”
— 「사람의 씨앗」 중에서

“수양의 문제를 세상 탓으로 돌리는 사람은 어리석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회는 잔인하다. 또 부와 권력을 함께 누리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는 저열하다. 물러나 있는 자는 마땅히 이황을 스승으로 삼아야겠지만 나랏일을 맡은 자는 이이를 닮아야 한다.”
— 「부와 권력에 관하여」 중에서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치기 힘든 공을 치기 위해 밤새 배트를 휘두르고, 잡기 힘든 공을 잡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일등들은 죽었다 깨도 이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말이다. 일등들은 꼴찌들 앞에 겸손해야 한다. 그들은 단지 당신들처럼 모든 것을 던지지 않았을 뿐이다. 당신들이 던져버린 것들 중에, 그리고 꼴찌들이 던지지 않은 것 중에, 혹 던지지 말아야 할 무엇이 있는지 어찌 알겠는가.”
— 「오지 않은 학생들의 이야기」 중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는데도 계속 돌아가야 하는 컨베이어벨트가 있다면 그것은 악마의 맷돌이다. 그런 세상 어디에도 숭고는 없다. 이것이 내가 이 아름다운 그림과 시를 마냥 편안한 마음으로 보거나 읽지 못한 이유다. 일터에서 죽어가는 노동자가 있는 한, 기계 때문에 목숨을 잃는 노동자가 있는 한 우리에겐 희망을 품을 자격이 없다.”
— 「베르메르와 쉼보르스카와 희망」 중에서

“돈의 힘은 더없이 편리하고 강력해서 돈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한 우리는 어디서나 한껏 친절한 응대를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커피를 타주는 할머니의 환대를 돈으로 살 수 없었다. 진심 어린 친절이기에 거래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사랑은 사랑으로만 교환할 수 있고 우정은 우정으로만 교환할 수 있다. 나는 비로소 까닭 모를 감동이 밀려온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환대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중에서

“숭고함에 관한 이런 서사는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구현하려고 부와 명예, 권력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린 이야기들은 동서고금에 널리고 널렸다. 그렇다면 진부하게 여겨질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동일 서사가 반복되는 것은 결국 그런 이야기가 매우 드물고 귀하다는 말이다.”
— 「숭고함에 관하여」 중에서

“피아노 레슨은 오래가지 못했다. 선생님은 〈엘리제를 위하여〉는 밀쳐두고 바이엘만 치게 했는데, 내가 그토록 단순하고 반복적인 연습에 금방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피아노를 배운 기간은 내게 쓸모없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훨씬 뒤 나는 다른 공부를 하면서 그처럼 단순하고 반복되는 과정을 견뎌내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았다.”
— 「반복에 관하여」 중에서

“나는 운동가도, 이론가도 아닌 평범한 독서인이다. 좋은 책을 만나면 곁에 두고 읽고,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나오면 암기해두었다가 두고두고 음미한다. 사회운동 경험이 없으니 세상을 바꿀 방법을 알지 못하고, 이론을 창안한 적이 없으니 앞날을 내다보지 못한다. 그래도 좋은 글에 의지하여 길을 가다 보면 바라는 곳에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 「독서에 관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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