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블랙리스트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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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준호 사회1팀 기자

    오랜만에 안부 인사를 건넬 겸 친여(親與) 성향의 인플루언서(※그에게 정치인이라는 수식어는 이젠 어색하다) A에게 메시지를 넣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네가 너무 진보 저격글을 많이 써서 민주진영에서 블랙리스트 됐어.” 협박인지 걱정인지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농담조로 “기자는 늘 블랙이죠”라고 받아넘겼다.
     
    블랙리스트란 단어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이전 정부를 무너뜨린 여러 요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A가 던진 그 단어를 곱씹다 한때 종합일간지 기자였다는 또 다른 친여 성향의 ‘파워 페부커’(※그에게 인플루언서라는 수식어는 아직 과분하다) B의 글을 보곤 무릎을 쳤다. 야당 서울시장 후보 유세차에 오른 20대 청년들의 사진을 공유하곤 “얘네들 얼굴 잘 기억했다가, 취업 면접 보러오면 반드시 떨어뜨리세요”라고 쓴 페이스북 글이었다.
     

    청년이 바라보는 세상은 보수·진보의 2차원적 흑백논리론 설명할 수 없는 3차원의 세계다. [뉴스1]

    청년이 바라보는 세상은 보수·진보의 2차원적 흑백논리론 설명할 수 없는 3차원의 세계다. [뉴스1]

    블랙리스트의 전제는 복수다. 17세기 영국 왕 찰스 2세가 청교도 혁명 당시 처형된 아버지 찰스 1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써 내려 간 정적(政敵)의 명단처럼 말이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른 뒤 네 편은 철저히 핍박하고 탄압한다. 이 시대 20대의 꿈이 생계와 직결된 취업이란 점에서 미수에 그친 B의 블랙리스트는 악질이다. 그 무시무시한 도구는 편 가르기가 여전한 지금도 아직 유효한가 보다.
     
    돌이켜 보면 애당초 청년들에게 이념의 이분법이 아닌 실용적 개혁을 주문하며 정치 참여를 독려한 이들 중엔 현 정부 경제정책의 밑그림을 그렸던 장하성 주중대사도 있었다. 그는 2015년 고려대 교수 시절 출간한 저서 『왜 분노해야 하는가』에서 “보수이든 진보이든 모든 정치인은 표밭에서는 갓끈을 고쳐맨다. 청년세대가 세상을 바꾸는 방법도 궁극적으로 표의 힘”이라며 “젊은이가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대학생들의 필독서로 꼽혔던 이 책이 주문한 대로 청년들은 대선(2017년)→지방선거(2018년)→총선(2020년), 그리고 4·7 재·보선을 거치면서 투표율을 큰 폭으로 끌어올렸다. 증가 폭은 다른 연령대를 압도한다. 이번 선거 결과가 증명하듯 청년의 표심은 늘 같지 않았다. 똑같은 기득권인 1, 2번은 싫었지만 내 표가 죽는 건 싫었다. 결국 1, 2번 중 내 얘기를 덜 무시하는 후보에게 아쉬운 한 표를 줬다.
     
    ‘가붕개’(가재·붕어·개구리)가 ‘개천의 용(龍)’ 편을 든다고 같이 승천하겠나. 단지 용이 가붕개의 편이 돼주길 바라면서 가끔 마음을 내어줄 뿐이다. “한 번의 투표와 한 번의 참여로 정치인과 정당이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청년세대의 반복적인 ‘심판 투표’가 계속되면 정당과 정치인은 바뀔 수밖에 없다. 그들은 표를 먹고 살기 때문이다.”(장하성, 같은 책) 그러니 부디 우리를 ‘블랙’으로 재단 말라.
     
    하준호 사회1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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