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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영 ㅣ 논설위원
    우리 세대의 4월을 압도하는 건 참담했던 패배의 기억이다. 그 밑바닥엔 스무살의 봄을 흔든 거대하고 불가해한 사건의 잔상들이 ‘불’과 ‘죽음’의 이미지로 침착되어 있다. 1991년 4월26일에서 6월15일 사이, 13명에 이르는 공화국 시민이 맞아서 죽고, 숨 막혀 죽고, 제 몸을 불살라서 죽었다. 공권력에 의한 타살부터 의문사, 분신자살까지 한국 현대사에 등장한 정치적 죽음의 형식들 대부분이 그 50일의 죽음 안에 응축되어 있었다.
    강경대(4월26일), 박승희(4월29일), 김영균(5월1일), 천세용(5월3일), 박창수(5월6일), 김기설(5월8일), 윤용하(5월10일), 이정순·김철수·차태권(5월18일), 정상순(5월22일), 김귀정(5월25일), 석광수(6월15일). 모두가 ‘열사’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다 같은 무게의 죽음은 아니었다. 장기투쟁의 발화점이 된 명지대생 강경대, 광주라는 도시 전체를 추모 열기로 가득 채운 전남대생 박승희, 민주노조운동의 핵심 사업장이었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타력에 의한 비극적 죽음의 정점에 있었던 성균관대생 김귀정을 제외하면 애도의 밀도는 성기고 지속기간도 짧았다. 이는 ‘분신’이라는 숭고하되 공포스러운 죽음 형식, 그 결행 주체 상당수가 하층노동자, 고교생, 무직자 등 사회적 마이너리티에 속해 있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죽음을 또 다른 마이너리티의 죽음이 상쇄했고, 그 위에 가공된 음모와 부주의한 의심이 신속하게 덧칠됐다.

    1991년 5월3일 강경대군 폭행치사에 항의하는 시위 도중 분신한 경원대 천세용군의 주검이 안치된 경기도 성남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경원대생들이 각목 등을 든 채 경비를 서고 있다. <한겨레> 자료

    1991년 5월3일 강경대군 폭행치사에 항의하는 시위 도중 분신한 경원대 천세용군의 주검이 안치된 경기도 성남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경원대생들이 각목 등을 든 채 경비를 서고 있다. <한겨레> 자료

    ‘민주열사’의 묘비명으로 남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죽음. 그들은 인화 물질이 아닌 가슴속 불덩이를 꺼내 제 몸을 태운 것이었다. 그 불덩이를 키운 것은 동년배의 죽음이 허망하게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제 한 몸 던져 새로운 세상을 앞당기고 싶다는 앞뒤 재지 않은 열정, 죽은 자를 향한 연민과 결합한 현실의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죽음이 이끌어간 장기적 소요 사태는 훗날 ‘91년 5월투쟁’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것은 1987년 ‘미완의 민주화’ 이후 공안정국과 3당 합당을 거치며 긴장을 키워온 국가권력과 사회운동세력이 ‘물리력 대 물리력’으로 충돌한 최후의 회전이었다. 거리에선 ‘공안통치 종식’과 ‘백골단 해체’라는 공식 슬로건 사이사이 ‘임시민주정부 수립’ 같은 설익은 혁명 구호까지 튀어나왔다. 그러나 거리 분위기는 4년 전과 달랐다. 끝이 안 보이는 죽음의 행렬 앞에서 사람들은 서서히 지쳐갔다. 국가권력은 그 권태와 조급함의 틈새를 파고들었고, 동요하던 전열은 검찰의 유서대필 조작과 학생들의 정원식 총리 폭행 사건을 거치며 빠르게 무너졌다.
    연이은 분신과 죽음에도 투쟁이 처절한 패배로 막 내렸을 때, 살아남은 자들의 자괴감은 극대화됐다. 1년 뒤 가수 정태춘은 노래했다.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92년 장마, 종로에서’)
    그해 봄의 죽음들이 올해로 30주기를 맞는다. 그사이 정권이 세차례 바뀌었고, 30년 전 거리를 내달리던 청년들은 오십줄에 들어섰다. 나는 그해 봄의 죽음들을 떠올릴 때면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널리 퍼진 상식을 반박하고 싶어진다. 1987년 6월항쟁에 이은 직선제 개헌으로 한국의 절차적 민주화가 완성됐다는 착각 말이다. 실제로 87년 이후에도 수많은 퇴행과 반동의 시간이 있었다. 공권력에 의한 타살, 의문사, 공안정국과 빨갱이 사냥, 인위적 정계개편은 그에 따른 크고 작은 항의를 촉발했고, 그 과정에서 무명의 숱한 마이너리티들이 갇히고, 다치고, 목숨을 잃었다.
    패배와 오류, 상처의 흔적을 지워버린 ‘승리 서사’는 그 주도 세력으로 공인받은 집단의 근거 없는 자기확신과 나르시시즘을 키운다. 이 승리 서사로 짜인 ‘87년 신화’를 후광 삼아 20년 가까이 한국 정치를 움직여온 한 세대의 상징적 인물들이 잇따라 ‘내로남불’의 화신으로 추락한 현실은 그런 점에서 필연에 가깝다. 역사는 승리뿐 아니라 패배를 통해, 저항 엘리트의 찬란한 성취뿐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희생을 동력으로 전진해온 사실을 잊는다면, 정의감 충만한 누구라도 집단적 나르시시즘의 포로가 된다.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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