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첫날부터 능숙하게’는 잊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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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염태정 EYE 디렉터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시절 두 차례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그레고리 핸더슨(1922~1988)은 ‘서울이 곧 한국’이라고 했다. 외교관이자 학자였던 그는 『소용돌이의 한국정치』(1968)에서 한국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자원이 서울을 향해 돌진하는 나라라고 했다. 이방인의 눈이지만 그의 진단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서울의 강력한 위상은 1394년 태조의 한양 천도 이래 60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조선 시대 서울시장인 한성판윤은 지금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자리였다.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물러나는 경우도 많았다. 황희를 비롯해 맹사성·서거정·권율·이덕형·박문수·박규수·박영효·민영환 같은 쟁쟁한 인물이 한성판윤을 거쳤다.
     

    시장경험 있다지만 10년 공백 커
    몸 낮춰야 그나마 협조 얻을 것
    전임자 좋은 정책은 이어갔으면

    오세훈 서울시장이 13일 국무회의 데뷔전을 치렀다. 같은 당 동지 한 명 없는 단기필마를 연상시켰다. “축하 난 감사하다”며 말은 점잖게 시작했지만, 문재인 정부의 주요 정책에 대한 발언은 공격적이었다. “방역체계를 유지하기 버겁다. 새로운 시도로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간이진단키트의 신속한 사용허가를 촉구한다. 부동산 공시가격 상승에 따라 급격히 증가하는 국민 부담을 줄이기 위한 법령 개정과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은 반박한다. “자가진단키트는 보조적 수단이다. 자칫 코로나19 확산이 우려된다. 공시가격 현실화율도 많이 반영 안 돼 있는 상황이다. 일부 지자체의 문제 제기는 잘못된 사실관계에 근거한 것이 많았다.”
     
    코로나19 방역과 부동산이 중앙정부를 상대로 한 거라면 광화문 광장은 서울시 내부 문제다. 서울시는 800억원을 들여 차로를 줄이고 보행로와 공원을 만드는 광화문 광장 재구조화 사업을 진행 중이다. 오 시장은 반대다. 코로나로 가뜩이나 살기 어려운데 누구를 위한 공사냐는 거다. 더불어민주당이 장악한 시의회는 계속 추진을 말한다. 시민을 위한 정책으로 이미 250억원이 들어갔으며 지금 멈추는 게 오히려 낭비란 주장이다. 싸움의 상대가 중앙정부건 서울시의회건 오 시장은 물러나지는 않을 기세다. 친정인 국민의힘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첫날부터 능숙하게’는 후보 시절 오 시장의 슬로건이다. 자신감 넘치는 말이다. 하지만 자신감만으로 일이 되는 건 아니다. 시 의회 의원 109명 중 101명, 자치구 25곳 중 24곳 구청장이 민주당 소속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 시장이 일하기는 어렵다. 중앙정부 설득은 더 큰 과제다. 그러니 일부에선 오 시장이 안 될 거 뻔히 알면서 목소리를 높여 존재감만 부각하려는 거 아니겠냐는 얘기도 나온다.
     

    서소문 포럼 4/15

    서소문 포럼 4/15

    1년 조금 넘는 임기 동안 실제로 일을 해내려면 시 의회와 중앙정부의 협조는 절대적이다. 몸을 낮추고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해야 그나마 협조를 얻을 수 있다. 오 시장 공약 가운데 여당의 협조 없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코로나19 방역이나 부동산 정책은 말할 것도 없다.  ‘불통과 아집은 넣어두라’는 시 의회 지적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전임 시장의 정책 가운데 좋은 건 계속 집행해야 한다. 필요한 때 물러서야 하고, 공약 철회가 필요하면 철회해야 한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됐다고 모두 비난받는 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집무실 광화문 이전은 시민 편의와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 철회했는데 돌이켜 보면 잘한 결정이다.
     
    지지자들이 내미는 청구서도 상당할 텐데, 거부할 건 거부해야 한다.  오 시장 당선 후 보수 성향의 단체들은 도심 집회제한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광화문 일대가 박원순 전 시장의 철저한 탄압에 신음해왔다고 주장한다. 방역계엄 고시를 철폐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만을 조건으로 서울 전역에서 집회를 보장해 달라고 요구한다. 코로나19에 대한 철저한 대비 없이 그런 청구서는 받아들이면 안 된다.
     
    서둘러서도 안 된다. ‘첫날부터 능숙하게’는 오히려 잊어야 한다. 시장 경험이 있다지만 10년의 공백은 크다. 서울 시정은 간단치 않다. 한 해 예산이 40조원이고 공무원만 1만7000여명이다. 서울교통공사를 비롯해 산하기관도 26개에 달한다. 기초연금에서 버스·수도료까지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서울시 업무를 인수위 과정도 없이 바로 시작했다. 세세한 업무 파악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서두르다 일을 망친다’(Haste makes waste)고 하지 않는가.  준비 없이 서두르다 쓰레기만 잔뜩 만들어 놓고 임기를 끝낼 수 있다.
     
    염태정 EYE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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