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 그들의 죽음을 제대로 기억하는 방법 / 최현진 : 왜냐면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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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현진
    1991년 열사투쟁 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
    대학 1학년은 가장 꿈 많고 활기찬 때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91년 4월26일, 이날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내 삶의 강렬한 서사가 됐다.
    명지대 1학년 강경대가 총학생회장 연행 규탄 교내 시위 도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끝내 숨졌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였다. 거리에서 국민들을 만나 왜 우리 경대가 그렇게 무참히 죽어야만 했는가를 알리고, 경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태우 정권에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그 세월 동안 나는 아이엠에프(IMF) 위기와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넘어야 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두 여중생의 죽음, 2008년 광우병 쇠고기 파동, 2014년 세월호, 2017년 국정농단과 탄핵 국면, 그때마다 나는 다시 거리에서 촛불로 저항했다. 인고의 날들이었다. 그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바로 1991년 열사들을 떠나보낼 때의 기억과 약속이었다.
    1989년 전교조 결성 당시 교단에서 쫓겨나는 선생님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고등학생들은 일찍부터 사회적 모순에 눈을 떴다. 이들이 대학에 들어와 운동권의 길을 간 것은 자연스러웠다. 강경대, 박승희, 천세용, 김영균은 바로 나와 같은 전교조 세대였다. 친구들과 후배들을 일깨워 5·18 광주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던 보성고 3학년 김철수 열사 역시 참교육 실천을 외쳤다. 노동자, 민중 열사들 역시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분신 당시 가난을 비관해 자살한 것처럼 언론에 보도됐던 이정순 열사는 독립운동가의 딸이자 여순항쟁의 유족으로 태어나 평화와 통일의 생을 살았다. 윤용하 열사는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이지만 당시 을 배달하며 청년단체에서 노동과 학습을 병행했다. 정상순 열사 역시 건설노동자로 살면서도 민주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처럼 1991년 열사들의 죽음은 결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죽음이 아니다. 그들은 허망함과 두려움, 연민과 절망감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열사들은 우리에게 ‘참담한 패배의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시대의 승리자였고, 1991년 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삶의 좌표가 되고 있다. 하지만 는 ‘1991, 마이너리티의 죽음과 ‘승리 서사’’라는 칼럼(이세영 논설위원)에서 열사들을 ‘마이너리티’로 규정했다. 명문대를 나와 학생회장을 하고, 그 경력으로 정치인이 된 86세대를 비판하기 위해 열사들의 투쟁을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죽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과연 그것이 1991년의 본질이고 핵심일까?
    지난 2월, 30년 동안 1991년을 추모해왔던 각 열사추모사업회와 1991년 당시 학생회를 이끈 5기 전대협과 ‘경대 친구 91학번’들이 모여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를 결성했다. 기념사업회는 4월26일 강경대 열사가 쓰러진 날부터 5월25일 김귀정 열사가 쓰러진 날까지 한달 동안을 집중 추모기간으로 정하고 추모행사와 학술 심포지엄, 다큐영화 제작 등을 준비 중이다.
    기념사업회의 사업목표는 ‘기억하고, 기록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참담한 패배의 기억’이 아닌 민주주의 발전을 이룬 소중한 역사로 1991년 열사투쟁을 ‘재조명’하고, 알려지지 않은 열사들의 생애를 올바로 기록하며, 그들이 외쳤던 공안통치 분쇄, 민중생존권 사수, 자주통일의 과제를 다시 오늘에 실천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제대로 된 ‘승리 서사’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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