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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십대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문맹률은 1% 이하지만
    문해력은 매우 낮은 한국사회

    낮은 문해력 이용해 돈벌이도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 대안은 없어

    문해력은 공동체 생존의 전제

    이해하려는 과정서 융합 발생
    이해 이전에 ‘판단 중지’를
    앎은 자기 진화의 과정

    나는 ‘종합일간지’ 몇 종을 꼼꼼히 보는 편이지만 주식, 부동산, 자동차 관련 기사는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공매도? 180마력? 이런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내 생활과 무관해서 큰 불편은 없다. 그래도 답답한 표현이 있다. 평수. 넓이를 제곱미터로 표현하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지만, 나처럼 평수 개념에 익숙한 사람은 25평이 편하다. 84㎡는 감이 안 온다. 자랑은 아니다. 다만, 세상 모든 문장을 어찌 다 이해하겠는가.
    위의 내 경우처럼 글자는 읽지만 문장을 이해하지 못할 때, “문해력(文解力, literacy)이 낮다”고 한다. 공매도(空賣渡, short selling)를 읽을 수는 있지만 “주식을 실제로 갖고 있지 않거나 갖고 있어도 상대에게 인도할 의사 없이 신용 거래로 환매(還買)하는 것”이라는 문장은 이해하지 못한다. 문해력은 글자를 보는 행위가 아니라 문장을 실제로 이해하는 능력으로, 인간의 사고방식을 좌우한다. 요즘은 문장뿐 아니라 특정 분야에 대한 인식으로서 생태 문해력, 이미지 문해력, 미디어 리터러시, 디지털 문해력 등 다양한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문자 읽기와 문장 이해는 전혀 다르다. 한국은 훌륭한 한글 덕분에 문맹률 1% 이하의 세계 최고의 글자 해독 국가지만, 문해력은 반대다. 조사 시기와 연령대마다 다르지만, 문해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 혹은 중간 이하라는 게 중론이다(20여 년 전, 최하위 통계가 있었다). 한국은 ‘지식 강국’과 거리가 멀다. 아마 한국사회의 문해력을 가장 실감하는 집단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원일 것이다. 초·중·고, 대학 모두 마찬가지다. 교실 붕괴, 강의실 붕괴는 이미 오래전 일이다.
    낮은 문해력은 소통과 직결되므로 사회 갈등의 주원인이 된다. 사회 갈등은 총기 난사와 인종 차별로 얼룩진 미국, 내전 중인 지역들, 한국 모두 심각하지만 우리의 갈등은 약간 다른 양상인 듯하다. 그들은 ‘진짜’ 사회 갈등을 겪고 있고, 우리는 문해력 부족으로 인한 의미 없는 소모전인 경우가 많다. 더구나 이를 진보-보수라는 내용으로 소위 식자층이 주도하고 있으니 더욱 심란하다.
    문해력은 인간의 조건, ‘상식 사회’의 초석이다. 낮은 문해력은 공동체의 존속을 위협하고 지적 양극화, 인간관계의 어려움 등 수많은 문제를 낳는다. 말이 안 통하는 사회를 대신할 사회는, 없다.

    분단 체제와 플랫폼 자본주의

    분단(分/斷) 체제의 기반은 이분법이고, 이분법은 문해를 불가능케 하는 가장 쉬운 논리다.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의 낮은 문해력의 근인은 분단과 식민주의다. ‘건국’ 이후 그리고 지금까지도 남한 사회 문해력의 기준은 외부였다. 반미, 반북, 친일…. 이와 관련한 언설이 그 자체로 ‘생명줄’이거나 ‘反(반)국가’인 사회에서 무슨 문해력을 논하겠는가. 국가보안법은 국가가 개인에게 행사하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인간과 지식 모두를 압살해왔다. 그러나 색깔론도 국가보안법도 여전히 활발히 작동하고 있다.
    1965년 3월, 소설가 남정현은 단편 ‘분지(糞地)’를 남한의 문예지 에 발표했는데, 작가도 남한 당국도 모르는 사이에 두 달 뒤 북한 노동당 기관지 에 전재되었다. 작가는 ‘충일기업사’라는 중앙정보부 을지로 대공 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작품과 관련한 작가 구속은 일제 시대에도 없던 일이다. 이처럼 사실관계 자체가 조작되는 상황에서 문해력은 사치일 것이다.
    ‘라떼’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문재인 정부에서 이토록 진영 논리가 판칠 줄 몰랐다. 정권 탓이 아니다. 그간 한국사회에 내재하고 있던 무지의 힘이 개인의 이해와 맞물려 폭발한 것이다. 중앙정보부 시절 양희은씨의 노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금지곡이었다. “사랑이 안 이루어진다는 부정적 사고방식” 이것이 이유였다. 이해하지 않으려고 작정한 경우다. 지금은 개인이 스스로 이해를 거부한다. 문해력이 없는 사회에서는 그것도 돈벌이 수단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당대 한국사회의 문해력은 그 낮은 수준조차 8·15, 미군정, 한국전쟁 때보다 후퇴했다.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사람과의 대화처럼 괴로운 일도 없다. 게다가 위계 관계 때문에 그런 재앙을 피할 수 없을 때의 스트레스와 분노는 몸의 면역력을 망가뜨린다. 소통 불가능성은 일상이 되었다. 전광훈, 강용석, 김어준씨 등 소위 관종으로 불리는 이들은 자신의 생계와 명예(?)를 위해, 말이 안 되는 소리로 도발한다. 그들은 허언으로 돈을 챙기는 이들이다.
    관련해 “‘다섯 줄’만 넘어가도 읽기 힘들어하는 아이들”(<한겨레> 인터넷판, 2019년 8월13일)이 제시한 대안을 보자. “‘북튜버(book+youtuber)’가 대신 읽어주는 책보다는 아이 손으로 직접 종이책 만져보고 소리 내어 읽어봐야 한다.” 중요한 지적이다. 모든 공부는 몸과 텍스트의 닿음과 느낌, 접촉을 통해 몸으로 익혀야 한다. 피아니스트는 피아노를 보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와 한몸이 될 때까지 친다. 반면, 공부는 남이 하는 것을 보는 시대가 되었다. 대책을 찾기는 쉽지 않은 듯하다.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에 전기(스마트폰, 컴퓨터 등)와 매개를 거부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산업자본주의 시기에는 몸을 써서 노동(공부)을 함으로써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았다. 잘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노동은 미덕이었다. 지금은 소비 주체의 시대다. 소비가 곧 노동이다. 온라인 공간에 오래 머물면서 자기 시간을 포털 사이트에 제공하는 소비행위가 공부(검색)가 되었다. 이 대세를 거스를 기력이 있는가. 하향평준화는 필연이다. ‘긴 글’이나 조금만 익숙하지 않은 문장에도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근본적으로 문해력을 높일 수 있는 대안이 없는 셈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를 직면하고 보완하려는 사회가 있고, ‘정보기술(IT) 강국’이라는 언설로 문제 인식조차 없는 사회가 있을 뿐이다. 한국은 후자의 대표적인 국가다.

    이해하려는 과정이 융합

    “학문의 한자 표기는 ‘學問’이다”, “셰익스피어는 배우였다”, “에는 ‘백상아리(백상어)’로 추정되는 어류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이처럼 정보에 가까운 문장은 문해력 논란이 적다. 그러나 “고대(古代)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여성과 남성은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 규범이다”, “기후위기는 자연을 대상화한 결과다”, 이때는 문해력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통념과 달리 문해력은 지식의 정도보다는 가치관과 태도의 영향이 크다. 초등교육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학력(學歷), 학력(學力)과 무관하다. 남녀, ‘페미와 마초’ 불문,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미 문해의 영역에 들어오기 어렵다. 최근 나는 건설자본주의 비판과 빈집 재활용에 관한 글을 썼는데, 곧바로 돌아온 반응은 “그러니까 오세훈을 찍지 말라는 거죠?”였다. 어느 유명 남성 지식인이 성폭력 가해자를 지나치게 두둔하여, 나는 피해자를 돕는 몇몇 이들과 함께 그 남성을 ‘설득’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대한민국에 나만한 문해력을 갖춘 사람이 없는데, 내가 당신들이(여성들이) 하는 이야기를 못 알아들으니, 이건 당신들 잘못이다.”
    문해력은 이해력이다. 그런데 ‘이해’의 의미부터가 매우 복잡한 문제다. 앎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 의미의 이동 즉 차이(差移) 그리고 유착(流着)의 반복, 즉 융합이기 때문이다. 이해 과정에서 이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이해는 본디 불가능한 일이다. 이때 위로가 되는 말이 있다. 마르크스가 죽기 전에 했다는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교조적으로 수용되기 쉽고 그는 레닌처럼 정치가가 아니라 사상가였기에, 또한 당시 수정주의 논란이 컸기에, “나의 마르크스주의는 어디로?” 같은 한탄이었을 것이다.
    문해력은 자신의 가치관과 무지에 대한 자기 인식의 문제다. 때문에 문해력 향상의 첫걸음은 에포케(epoche, 판단 정지)이다. “나는 모른다”가 공부의 시작이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해력부터 의심해야 한다. 물론 우리 몸에는 이미 많은 의미들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무지라는 가정을 위해서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 공부가 중노동인 이유다.
    잠깐의 판단 중지. 그 잠깐의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른다. 앎은 자기 진화의 과정이지 시비를 판단하는 행위가 아니다. 지식을 정보로 아는 이들은 타인을 ‘가르치려 들지만’, 아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들은 우리를 ‘가르친다’.

    정희진 ㅣ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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