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함을 거부하고 ‘이상한 엄마’를 연기한 윤여정의 전환점[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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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났다. 윤여정씨가 여우조연상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예상한 대로 수상했다. 기대한 바인데도 무척 기쁘다. 기쁨은 비단 영화평론가이자 동종업계 종사자들에게만 해당하지는 않는 듯싶다. 시민, 영화 소비자, 관객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다. 그건 아마도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필모그래피, 전 생애가 주는 어떤 뭉클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1947년생 한국 나이로 올해 75세인 윤여정이 인생 최고의 순간을 바로 지금 맞았다는 것에 어떤 위안과 행복을 느끼는 듯싶다. 인생 살아볼 만할 것 같다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래픽 | 이아름 기자

    비관하고 있었던 수상이지만 결과적으로 제대로 상이 간 분야도 있다. 바로 남우주연상 부문의 앤서니 홉킨스이다. <더 파더>는 앤서니 홉킨스가 지금껏 보여주었던 연기 그 이상을 보여준 작품이다. 발터 베냐민은 예술이 가진 일회적 분위기를 아우라라고 명했는데, 이는 에피파니라고 부를 수도 있다. 알츠하이머로 인해 혼란에 빠진 앤서니 역할을 한 앤서니는 정말이지 단 한 번 찰나적으로 도래할 법한 마법적 순간을 보여준다. 채드윅 보즈먼이 훌륭한 연기를 보인 후 고인이 되어, 관례상 그가 수상하게 되지 않을까 짐작했을 때, 너무 안타까웠던 것도 이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미나리>의 순자가 윤여정의 최고 연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 대한민국 관객들에게 윤여정은 이미 최고의 연기를 여러 번 보인 적 있다. 윤여정은 데뷔작부터 언제나 자기 자신을 경신해 온 배우이다. 지금의 기준에서 돌아봐도 윤여정은 운도 좋고, 당돌하고, 영리하다. 1970년대 윤여정이 TV 탤런트로 데뷔할 때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주연급 여배우에 대한 전형적인 사회적 요구가 뚜렷했다. 당시 전형적인 미인도, 그렇다고 고분고분한 느낌도 아니었던 윤여정은 <장희빈>이라는 악녀 역을 그럴듯하게 소화해내 단숨에 이름을 알렸다. 말하자면, 윤여정을 알아본 작가와 연출가들의 ‘감’이 통했던 것이다.

    김기영 감독의 1971년 <화녀> 포스터, 50년만에 재개봉하는 <화녀> 포스터. 다자인소프트 제공

    김기영 감독의 1971년 <화녀> 포스터, 50년만에 재개봉하는 <화녀> 포스터. 다자인소프트 제공

    김기영 감독의 <화녀>도 그렇다. 닭 농장, 쥐약, 낙태, 살인과 같은 자극적 소재와 기이한 촬영 방식, 독특한 미장센으로 대중에게 외면받았을 듯하지만 <화녀>는 당대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었다. <화녀>는 서울에서 단관 개봉해 20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이 성공을 발판으로 이듬해 <충녀>도 제작될 수 있었고 이 역시 16만명 관객 동원에 성공했다. 윤여정은 연이은 히트작을 낸 슈퍼 루키였던 셈이다.

    윤여정을 운도 좋고, 영리한 배우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윤여정의 연기 생애에서 그녀의 의지가 더 돋보이기 시작한 순간은 영화계에 복귀한 중년 이후부터이다. 2003년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이야말로 일종의 전환점이라 부를 수 있다. 이미 TV 스타로 자리 잡았던 윤여정은 그녀 말처럼 “결혼을 반대하는 엄마 역할”만 해도 겹치기 출연을 이어가며 편안한 중년의 삶을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윤여정 주연의 영화 <죽여주는 여자>. 사진 CGV 아트하우스 제공

    윤여정 주연의 영화 <죽여주는 여자>. 사진 CGV 아트하우스 제공

    하지만 윤여정은 머물지 않고, 이상한 엄마 역할을 도맡기 시작했다. 늘그막에 성적 쾌감을 알았다며 며느리 앞에서 고백하고, 권력과 돈을 이용해 젊은 고용인의 성을 착취하고, 자양강장제를 들고 공원을 누볐다. 그 어떤 역할도 선뜻 맡기도, 잘해내기도 만만치 않던 역할들을 윤여정은 덥석덥석 맡아 해냈다. 윤여정 덕분에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어진 <죽여주는 여자>는 그런 점에서, 윤여정이 없었더라면 훨씬 더 늦게 왔을 작품이다.

    중요한 것은 윤여정의 수상이 그녀의 겸손한 말처럼 운이 좋아 얻어걸린 돌발적 결과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살기 위해 뭐든 해냈던 젊은 시절과 출연료보다 사람을 먼저 볼 수 있는 사치스러운 노년이 있어 가능한 선택이었다. 윤여정은 많은 작품은 아니지만 한국 영화 마디마디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윤여정의 수상은 명예를 아우르는 공로상이 아니라 활동하는 현역에게 주어지는 평가였다. 바로 작년에도 윤여정은 영화를 찍었고, 올해도 찍는 중이며, 내년에도 작품에 등장할 것이다. 운과 의지의 연금술로 윤여정은 당신 말처럼 계획에도 없던 대단한 성과를 일궜다. 윤여정이 한국 영화의 일회적 역사가 아니라 하나의 패턴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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