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읽기] ‘깜깜이’라는 말은 혐오 표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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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강명 소설가

    맹인, 장님, 소경, 봉사라는 단어를 들어본 지 오래됐다. 이렇게 시각장애인을 낮춰 부른다는 이유로 쓰지 않게 된 단어의 명단에 곧 ‘깜깜이’도 추가될 듯하다. 장애인단체와 운동가들은 얼마 전부터 이 단어가 시각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용어라고 주장한다.
     

    “왜?”라는 질문 막는 선언들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논의
    ‘혐오 표현’ 낙인찍기 쉬워져

    그런 지적이 나오면서 정은경 질병관리청장도 지난해 브리핑에서 “앞으로 ‘깜깜이 감염’ 대신 ‘감염경로 불명’으로 표현하겠다”고 말했다. 정 청장은 한국어 전문가가 아니지만 우리는 그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이후 언론에 ‘깜깜이’라는 용어가 나오면 진보 매체들이 “정 청장도 안 쓰는 차별적 용어를…”이라며 비판한다.
     
    요즘 이런 논의는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어떤 표현에 소수자 혐오가 담겨 있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대단한 노력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할수록 인권 감수성이 높다는 평판을 얻고, 세상을 바꾼다는 보람과 은근한 도덕적 우월감을 누린다. 반면 여기서 체계적 회의주의를 주장해봐야 꼰대나 소시오패스처럼 비칠 뿐이다.
     
    문제 제기에 회의적인 사람은 침묵하고, 동의하는 사람은 점점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 구조다. 그러다 보니 소수가 다수를 쉽게 움직일 수 있다. 게다가 이런 규정은 자기실현적인 면이 있다. “이 단어는 혐오 표현”이라고 누군가 선언하면 그다음부터 그 단어는 실제로 혐오스럽게 들린다.
     
    언어의 변화나 차별적 용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논의 구조가 이렇다 보니 어떤 단어에 혐오 표현이라는 낙인을 찍기가 너무 쉬워졌다. 반론이 차단되는 양상은 얼마간 전체주의적 선동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한데 그런 주장들 중에는 설득력이 약한 것도 많다. ‘깜깜이’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틀딱충, 된장녀’는 특정 계층을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틀니와 된장은 값진 사물이 아니고, ‘충, 녀’라는 접미사에 존중심은 없다. 반면 ‘깜깜이’는 형용사 ‘깜깜하다’가 명사화한 것으로, 사람이 아니라 상태를 가리킨다. 시작도 시각장애인과는 관련이 없다. 부동산업계에서 ‘깜깜이 청약’이라는 식으로 먼저 쓰였다는 말도 있고, 포커판에서 자기 패를 보지 않는 행동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이 단어는 나온 지 불과 15년 남짓 됐다. 나는 미처 못 들어봤지만, 일부 세력이 그새 이 신조어를 빌려와 시각장애인을 비하하는 데 쓴 걸까? 그렇게 차별주의자들이 오염시켰으니 바로 버려야 하나? ‘불명’보다 훨씬 나아 보이는 우리말인데. 외려 대다수 언중의 의도대로 제대로 써서 정확히 정착시키는 게 그런 혐오에 맞서는 일 아닐까?
     
    혹자는 이유야 어찌 됐건 당사자들이 불쾌해하니 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당사자주의’에 나는 얼마간 의문을 품고 있다. 그러면 재계의 요청에 따라 재벌을 대기업집단으로 불러줘야 하나? 일본이 원하니까 일왕은 천황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당사자주의는 약자에게만 적용되는 원칙이라고 한다. 원칙인데 보편적이지 않은 원칙은 그 자체로 괴상하고, 실제로 적용을 어떻게 하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인가. 젊은 여성 언론인은 ‘기레기’라는 말을 들어도 괜찮은 권력자인가. 그걸 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린 이미 당사자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 같다. 거의 매일같이 여러 단어들이 여러 소집단들에 의해 혐오 표현으로 규정당한다. ‘네가 내 입을 막으니 나도 네 입을 막겠다’는 의도가 빤히 뵈는 경우도 있는데 당사자주의에 따르면 반박할 수가 없다. 그 단어들을 모르고 썼다간 가혹한 집단 처벌을 받는다. 이렇게 『1984』가 도래하나?
     
    아이가 넘어졌을 때 간혹 “땅이 나빴다”며 바닥을 때리는 시늉을 하는 이들이 있다. 가장 극단적인 당사자주의다. 아이의 장래에 좋은 행동은 아닐 테지만 이해는 한다. 고통을 받아들일 만큼 아이가 성숙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어른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며, 오히려 그런 받아들임으로 자신의 지성과 강인함을 확인한다. 거기에서 진짜 자존감이 자란다.
     
    언어는 상처를 준다. 발화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렇게 될 때도 있다. 그런 고통을 다 같이 줄여나가자. 하지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모두 금지하자는 발상은 우리 모두를 정신적 유아로 만들고 마는 것 아닌가 나는 걱정스럽다. 그것이 과연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시각장애인과 운동가들의 지성과 강인함을 믿기에, 정중히 묻고 함께 토론하고 싶다. 과연 우리는 ‘깜깜이’라는 말을 금지해야 하는가.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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