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할머니와 엄마 – 중앙일보

최근 게시물 게시판 뉴스이슈 [서소문 포럼] 할머니와 엄마 – 중앙일보

  • 이지영 문화팀장

    열아홉살 청년이 팔순 할머니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반지를 건네며 프러포즈를 한다.
     

    TV예능까지 부는 ‘K-할머니’ 바람
    엄마 캐릭터는 이기심·집착에 오염
    “꼰대 부모세대에 대한 반감이 원인”

    상상만으론 도무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 장면이지만, 두 시간 남짓 이들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들도 그 청년의 마음이 된다. 엉뚱하지만 사랑스럽고 지혜로운 할머니의 유쾌한 매력에 빠져드는 것이다. 23일까지 서울 KT&G상상마당 대치아트홀에서 공연하는 연극 ‘해롤드와 모드’ 얘기다.
     
    ‘해롤드와 모드’는 실제 할머니들의 활약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주인공 모드를 연기하는 박정자(79)와 연출자 윤석화(65) 모두 ‘할머니 나이’지만 이들이 구현해내는 예술의 경지는 여전히 전성기 수준이다.
     
    바야흐로 할머니의 시대가 펼쳐진 걸까. 일흔넷의 윤여정이 한국 배우 최초의 아카데미 연기상을 거머쥐면서 여기저기서 ‘K-할머니’ 신드롬에 대한 분석이 한창이다.
     
    문화의 영역에서 할머니의 부상은 두드러진다. 조역·단역에 그치지 않고 메시지의 중심이 됐다. 윤여정의 ‘미나리’만이 아니다. 지난해 미국 최고 권위의 아동문학상인 뉴베리상을 받은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When You Trap a Tiger)』에서도 할머니는 이야기의 중심축이다. “4분의 1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작가 태 켈러는 한국인인 외할머니가 들려준 전래동화 ‘해님 달님’을 모티브로 책을 썼다. 미국의 대형 출판사 랜덤하우스가 출간한 이 책에서 주인공 릴리의 한국인 할머니를 지칭하는 단어는 ‘grandmother’ 가 아니라 대문자로 시작하는 ‘Halmoni’다. 여느 할머니와 다른 한국 할머니의 독창적인 캐릭터를 미국의 독자들도 받아들이는 셈이다.
     
    오랜 기간 ‘K-할머니’ 는 희생적인 사랑의 대명사였다.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를 거쳐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는 동안 한 번도 주인공으로 조명받지 못했다. 가부장적 사회의 차별과 편견까지 참아내야 했던 세대다. 그 묵묵한 세월을 지나며 우리의 할머니는 유머와 여유를 함께 갖춘 지혜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서소문 포럼 5/19

    서소문 포럼 5/19

    지난 4일 첫 방송한 관찰예능 ‘와썹 K-할매’(JTBC)는 이런 할머니의 강점을 십분 활용했다. ‘외국인 손자와 시골 할매의 기막힌 동거’를 부제로 붙이고, 외국인과 할머니의 2박3일 시골 생활을 보여준다. 당황할 법한 상황에서 할머니들이 발휘하는 기지는 기대 이상이다. 드립커피 필터가 없어 종이컵에 구멍을 뚫어가며 용을 쓰는 외국인 청년에게 할머니는 한약 달일 때 썼던 면포를 갖다준다. 주름진 손으로 깨강정을 만들고 능숙한 칼질로 칼국수 면발을 썰어내는 모습에선 평생을 가족 뒷바라지에 헌신했을 삶이 비쳐 뭉클한 감동까지 더한다.
     
    전성기를 맞은 할머니와 반대로 모성신화로 포장됐던 엄마의 위상은 흔들리고 있다.
     
    주간 시청률 1위를 고수하고 있는 KBS 주말드라마 ‘오케이 광자매’에서 주인공 집안의 엄마는 방송 첫 주에 피살된다. 7주 만에 드러난 살인 사건의 실체는 바람난 엄마의 자작극이었다. 남편에게 누명을 씌워 집까지 가로채기 위해 차 타이어에 펑크를 냈다가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가족드라마로서 황당한 설정이지만, 시청자들은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모양새다.
     
    뉴스 속 실제 엄마들의 모습도 실망스럽다. 얼마전 유튜버 폭로로 공개된 정인이 양모의 편지만 해도 그렇다. 제 뜻으로 입양한 생명을 잔인하게 폭행해 숨지게 만든 지 불과 7개월. 남편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그는 다섯 살 친딸의 영어 공부 걱정에 여념이 없다. “영상이나 책을 한국어로만 보여주는 것보다 꾸준히 영어로 보고 들려주는 게 좋다”며 꼼꼼하게 조언하는 그 마음에 모성애란 이름을 붙여도 좋은 것인지, 섬뜩할 지경이다.
     
    엄마의 이미지가 무너지는 데는 정치인들도 한몫했다. 부동산 투기와 입시 비리 등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들어왔던 ‘아내 탓’이 이젠 직접 권력을 갖게 된 여성들의 ‘엄마 찬스’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선거 때마다 ‘엄마 마음’ 운운하는 여성 후보들의 슬로건에 더이상 마음이 열리지 않게 된 이유다.
     
    이기심과 집착, 속물근성이 엄마상을 오염시키는 사이 사랑과 희생의 아이콘 할머니에 대한 호감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에 따르면, 이런 현상의 이면엔 세대 갈등이 있다. 부모 세대를 직장이나 가정에서 이기적 ‘꼰대’로 접하며 생긴 반감, 능력 있고 쿨한 할머니 세대에 대한 로망 등이 결합한 결과란 분석이다. 마음 시린 대중들에게 위로와 웃음, 그리고 지혜와 희망을 주는 할머니 바람은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이지영 문화팀장


    Source link

    신고하기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