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철의 시선] 술 상무와 안전 상무

최근 게시물 게시판 뉴스이슈 [최현철의 시선] 술 상무와 안전 상무

  • 최현철 정책디렉터

    접대가 일상이던 시절이 있었다. 영업에는 술자리가 빠지지 않았다. 회사 고위층이 나와 모두가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셔줘야 성의를 다한 것 같았다. 바쁘고 피곤한 회장님·사장님들로선 건강과 업무 효율에 실제적인 위협이었다. 그래서 꾀를 낸 것이 ‘술 상무’다. 특별히 하는 일은 없지만, 고위직이라는 느낌을 주는 자리에, 술 잘 마시는 사람을 앉혀 접대 자리에 대동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윗사람 대신 술 마셔주는 역할을 하면 모두 술 상무라 불렸지만, 진짜 술 상무가 회사의 실질적인 의사 결정에 참여할 일은 없었다.
     

    중대재해법 시행령 막판 조율중
    처벌은 안전 관련 투자 유인책
    실권없는 안전 상무론 역부족

    술 상무보다 더 높은 ‘무늬만 직급’도 있다. 바지사장이다. 보통 불법 영업을 일삼는 유흥업소나 사채업처럼 처벌의 위험을 감수하면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사업에서 자주 나타난다. 늘 처벌의 위험에 시달리는 사업주로선 영업을 포기하는 것보다 수익 일부를 월급으로 떼주고, 대신 적발되면 책임을 뒤집어쓸 사람을 고용하는 게 이득이다. 바지사장도 직급은 대표지만, 아무런 실권이 없다.
     
    ‘바지사장’이 감수해야 할 위험에 비하면 산업 현장에서 안전 수칙을 어기는 것쯤은 불법도 아니었다. 적발될 일도 없거니와 사고가 나서 회사의 과실이 드러나도 처벌은 벌금 몇백만원이 고작이다. 위험한 작업에는 두 명 이상 짝지어 배치하고, 안전 장비를 지급하거나 명백히 위험해 보일 때 작업을 멈추게 하는 것, 이 모두가 결국 돈이다. 최종 의사결정자로선 그 돈을 지출해 수익을 줄일 유인이 없다. 본인이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청이나 파견업체에 맡기면 더 편하다. 안전을 위한 비용을 넉넉하게 쳐주지 않아도 도급받겠다는 업체는 줄을 선다. 책임도 대신 진다. 위험의 외주화다. 연간 2000명 넘는 노동자가 일터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직업병에 걸려 목숨을 잃어도 관행은 고쳐질 줄 몰랐다.
     
    그런데 올 초 중대 재해 처벌법이 덜컥 제정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벌금이 과거보다 훨씬 많아진 데다, 사망 사고가 나면 자칫 1년 이상 감옥에 갈 가능성도 생겼기 때문이다.  
     
    당장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고로 직원이 죽을 때마다 사장이 감옥에 가야 한다면 경영은 어떻게 하느냐는 여론전이다. 안전의무를 다하지 않아 사고가 났을 때만 처벌받는다는 내용에는 슬쩍 눈을 감는다.
     
    그다음은 법률전. 악마는 디테일에 있기 마련이다. 법에서 위임된 세밀한 적용 기준을 정하는 시행령에 대해 지난달 전경련과 경총 등 6개 단체가 합동으로 의견서를 냈다. 핵심은 ▶만성적 직업병은 ‘중대재해’에서 빼고 ▶안전담당을 임명해 ▶연 1회 이상 보고를 받으면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의 책임을 면제해주자는 것이다. 실제 여러 기업이 최고안전책임자(CSO)를 속속 임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벌 위험에서 벗어난 사업주나 경영 책임자가 안전책임자에게 예산과 권한을 몰아줄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비판이 나왔다. 술 상무처럼 실권이 없는 ‘안전 상무’로 때우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그런데 지난달 22일 평택항에서 젊은 대학생 이선호씨가 300kg짜리 철판에 깔려 숨지는 사고가 나면서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정확히는 사고 보름 만에 고인의 친구가 SNS에 사정을 올린 게 기사화되면서다. 당시 ‘한강 대학생 실종 사건’이 언론에 실시간으로 중계되다시피 하며 온 국민의 관심을 끌던 와중에도, 이씨 죽음이 조금씩 조명되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관련 부처 TF를 구성해 대책을 만들라고 지시했고, 빈소까지 찾아가 유족을 위로했다. 이달 말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초안을 발표하려던 고용노동부로서는 재계의 요구를 다 들어주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
     
    2018년 충남 태안의 발전소에서 김용균씨가 산재로 숨진 뒤, 어이없는 죽음을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자 국회는 1년 만에 일명 ‘김용균법’(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위험을 외주화할 통로는 여전히 열어두고 책임자 처벌 수위도 달라진 게 없었다.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라는 비아냥은 금세 현실이 됐다. 이선호씨의 아버지는 “일당 10만원의 신호수만 세웠어도 아들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절규했다.
     
    허술한 김용균법에 분노한 노동계와 국민의 요구에 결국 올 초 중대 재해 처벌법이 국회 문턱을 넘었다. 그렇다고 이 법의 목적이 복수를 위한 것은 아니다. 처벌은 노동자의 안전과 목숨을 위한 투자를 유인할 수단에 불과하다. 그 투자 규모가 ‘안전 상무’  임명 수준이라면 반복되는 죽음을 막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면 또다시 ‘이선호법’을 만들자는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최현철 정책디렉터


    Source link

    신고하기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