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응징 사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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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태인 JTBC 기동이슈팀 기자

    응징은 국가의 특권이었다. 규칙을 위반한 자에게 공적 기관이 수사와 재판으로 책임을 묻는 절차. 정의(正義)를 세우는 데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사람들은 참고 기다려줬다. 문제는 여기에 ‘지금까지’라는 단서가 붙기 시작했다는 것. 최근 한국 사회의 응징엔 공권력은 보이지 않고 응징하는 자들과 응징당하는 자만 눈에 띈다. 경찰과 검찰을 불신하는 ‘방구석 코난’의 등장은 응징 사회의 예고편이다.
     
    영화 ‘부산행’의 감독 연상호가 쓰고, 웹툰 ‘송곳’의 작가 최규석이 그린 ‘지옥’은 미지의 존재에게서 죽음을 예고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옥 스포일러 주의)
     
    이 웹툰에서 지옥행 고지를 당한 사람은 죄인으로 낙인찍혀 ‘화살촉’이란 자경단에 신상이 털리고 린치를 당한다. 공적 기관을 상징하는 형사가 등장하지만, 그 역시도 아내의 살인범에게 ‘심신 미약’을 인정하는 국가에 좌절감을 느낀다. 모두가 정의를 외치지만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지옥도가 웹툰 곳곳에서 펼쳐진다. 이 이야기의 재료 역시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다.
     

    시선2035 5/24

    시선2035 5/24

    아직 미국이나 유럽처럼 무장한 자경단이 활동하고, 주지사를 납치하려는 계획까지 세울 만큼 정부를 불신하는 이들은 극소수다. 하지만 좌우 극단에서 대중을 선동하는 프로보커터(Provocateur)들의 활발한 활동을 보면 우리에게도 그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공권력이 나서기 전에 신상털기와 낙인찍기로 먼저 심판과 응징을 당하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의 공적 처벌은 부수적인 것이라 느껴질 정도다.
     
    현실에서 정의를 세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확실한 증거를 제출해도 기소까지 최소 수개월. 재판 일정이 더해지면 1심 선고가 나오는 데 1년이 넘어가기도 한다. 내 사건을 자기 사건처럼 생각해주는 경찰과 검사를 찾기도 어렵다. 법원에서 ‘합리적 의심 없는 정도’의 증명을 요구하니 정의는 늦게 돌아온다.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른 속도에 익숙한 우리에겐 ‘공적 복수’는 답답함을 안겨준다.
     
    시스템이 완벽하다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서로가 서로를 처벌하는 ‘응징 사회’는 해법이 될 수 있을까. 웹툰 ‘지옥’에서 사람들은 지옥행 고지를 받는 이들을 죄인이라 낙인찍고 그들의 죽음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죽음을 고지받은 자 중엔 벌을 받을 이유가 없는 선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남은 가족들이 겪을 낙인이 두려워 고지를 숨기고 사고로 위장한 소멸을 택한다. 진실을 알게 된 자들은 그걸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죽임을 당한다.
     
    지금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는지 모른다. 공적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에게 신뢰를 회복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저격과 응징만 있는 사회를 정의롭다고 하긴 어렵다. 그래서 매일이 두렵다.
     
    박태인 JTBC 기동이슈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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