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준의 의학노트] 의사들의 고통스러운 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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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재준 서울대 의대 교수 의학교육실장

    전문의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일이다. 숨이 차다며 병원을 찾은 환자를 진찰하고 검사해보니 ‘폐섬유화증’이었다. 안타깝게도 병이 계속 진행해 숨은 점점 차올랐지만, 그때만 해도 마땅한 치료가 없었다. 70대 중반이었던 환자에게 병이 진행하고 있고, 효과적인 치료법은 없으며,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했다. 예상대로 환자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얼마 후 환자의 아들이 병원의 담당 부서를 통해 민원을 냈는데 요지는 이랬다. 언제나 환자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의사가 도리어 환자와 가족을 절망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이런 소식을 전하는 의사들이 냉정해 보이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사들도 이런 상황이 몹시 괴롭다.
     

    환자 상태 정확히 알리는 건
    의사에게도 무척 어려운 일
    진료 시간 턱없이 짧더라도
    환자의 두려움에 공감해야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대학병원 레슬리 팔로필드 교수팀이 오래 전 발표한 연구가 있다. 연구진은 암 환자를 주로 진료하는 178명의 의사들에게 여러 상황을 제시하고 환자에게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평가하게 했다. 치료 반응이 괜찮은 암으로 진단된 환자에게 설명하는 것에는 8.5점(10점 만점)으로 자신감을 드러냈던 의사들은 암이 재발되었다는 것을 알려야 할 때는 6.6점으로 자신 없어 했다. 그렇지만 더욱 어려워한 상황은 어떤 치료에도 듣지 않으니 이제 적극적인 치료는 중단하자고 설명해야 할 때였는데, 자신감 점수가 겨우 5.8점이었다.
     
    특히 죽음을 앞둔 환자가 아이라면 더욱 그렇다. 캐나다 소아암 전문의 52명이 참여한 연구가 있다. 연구자들은 아이들의 병과 관련된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 어려운지 물어 보았다. 의사들의 10%는 항상 그렇다고 했고, 10%는 자주, 45%는 간혹 힘들다고 응답했다. 왜 힘드냐는 질문에 일부 의사들은 가족들이 앞으로 아이가 어떻게 되는 건지 물어볼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소아암 전문의들조차 가족들에게 아이의 상태가 나빠질 가능성이 많다고 얘기하기 힘들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에게 상황을 정확하게 알리는 것은 의사의 의무다.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대학병원 종양내과 안젤라 홀 교수팀이 유방암 재발로 진단된 환자들을 인터뷰하여 분석한 연구가 있다. 주치의에게 정확하게 설명을 들은 어느 환자의 말이다.
     

    의학노트 5/28

    의학노트 5/28

    “암이 재발했으니 제 수명은 줄어들겠지요. 물론 어느 누구도 제 병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는 점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의사 선생님은 사실대로 얘기해주고 제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정리해야 할 것들을 챙길 수 있으니까요.”
     
    한편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냐고 의사에게 물었던 60대 초반의 환자는 도대체 감을 잡을 수 없었다며 불만스러워했다. 그녀의 주치의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그건 의사인 저도 잘 모릅니다. 2개월 정도 남았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여든까지 사실 수도 있어요. 사람마다 다르거든요. 유방암이 폐로 번진 심각한 상태지만 이대로 오래 유지될 수도 있습니다.”
     
    환자가 자신의 현재 상태와 예상되는 경과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의 대가는 무척 크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대신 소용없는 치료에 매달리고,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말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결국 원치 않는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나라 의료제도가 속전속결과 박리다매를 강요하여 중병을 가진 환자들에게도 상세히 설명할 시간을 내기 어려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의사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린다 포가티 교수팀은 40초만 투자해도 환자의 불안을 덜어줄 수 있다는 연구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 연구에서 의사가 40초 동안 했던 일은 다음과 같이 환자에게 말한 것이 전부였다.
     
    “힘든 상황이라는 점을 잘 이해합니다만, 제가 함께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오늘 제가 설명해드린 것들 중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마음 편하게 물어보세요. 우리가 여기 함께 있고, 앞으로 닥칠 어려움도 함께 헤쳐나갈 겁니다. 제가 앞으로 모든 단계를 함께 하겠습니다.”
     
    의학적 사실을 정확히 알리면서도 환자와 가족들의 두려움과 염려를 이해하고 공감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책무를 잘 감당하는 의사들이 더 많아지길 소망한다.
     
    임재준 서울대 의대 교수 의학교육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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