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기우제 지낸 유학자, 절 짓는 사대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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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억불숭유, 그 반쪽의 진실

    용은 동양 사회에서 제왕을 상징했다. 또 용 그림은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기우제에 자주 사용됐다.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제작된 민화 ‘운룡도(雲龍圖)’다. 상하좌우 네 귀퉁이에 ‘수탁용도(水濯龍圖)’라고 적혀 있다. [사진 갤러리조선민화]

    용은 동양 사회에서 제왕을 상징했다. 또 용 그림은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기우제에 자주 사용됐다.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제작된 민화 ‘운룡도(雲龍圖)’다. 상하좌우 네 귀퉁이에 ‘수탁용도(水濯龍圖)’라고 적혀 있다. [사진 갤러리조선민화]

    #장면 1
     

    자연과 죽음 앞에 선 인간의 한계
    귀신 부정하는 유교도 불교 포용
    건국 초 탄압받던 사찰 중건 늘어
    나라살림 안정되며 관용 폭 커져

    “먹는 것이 백성의 하늘이고 백성에게 신령이 의지하나니, 백성이 아니면 신령이 배를 곯고 식량이 아니면 백성이 굶주리나이다…. 토지와 샘이 타들어 가고 농지를 포기한 채 농사짓지 못하여, 온 고을이 불사른 듯하니 하민(下民)들이 탄식하고 있나이다…. 재해를 당함이 이토록 혹독하여 반성하자니 부끄럽고, 저의 마음을 불타는 듯하고 저의 살을 베어내는 듯하나이다…. 지방 수령에게 허물이 있어 내리시는 벌을 사양하기 어렵지만, 백성들이 거의 죽게 생겼으니 신령께서 어찌 이러실 수 있나이까.”
     
    1617년, 충청도에 가뭄이 들었다. 이경여(李敬輿)는 충주 현감으로 기우제를 지냈는데, 그때 지은 제문이다.
     
    #장면 2
     
    한 달 전 전북 부안 개암사(開巖寺)로 답사를 갔다. 개별꽃·봄까치·애기나리 같은 초목도 우리를 반겼다. 대웅전(보물 제292호)에 올라갔는데 1636년 중건된 건물이었다. 바로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다. 완주 송광사(松廣寺)도 1636년까지 중건이 진행됐다.
     
    대수롭지 않은 것 같은 두 사례는 생각할수록 이상한 경우다. 장면 1을 보자. 이경여는 세종의 후손으로, 문과에 급제한 유학자다. 『논어』에서 공자가 괴이한 일이나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고 한 이래, 유가(儒家)는 복을 빌거나 악귀를 물리치는 굿, 비가 오기를 바라는 기우제 등은 음사(淫祀), 즉 예법에 맞지 않는 과도한 제사로 생각하고 배척했다. 그가 지방관으로 기우제를 지내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무당의 역할을 지방 관리가 대신해
     

    가뭄은 농경사회 조선의 크나큰 재앙이었다. 유교를 신봉한 사대부들도 천지신명께 기우제를 지내야 했다. [중앙포토]

    가뭄은 농경사회 조선의 크나큰 재앙이었다. 유교를 신봉한 사대부들도 천지신명께 기우제를 지내야 했다. [중앙포토]

    유가(유교)의 우상, 미신에 대한 터부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조선 사회가 유교화하면서 국사당(國師堂)에 있는 신상(神像)이 철거되기 시작했다. 개성 대황당에는 흙으로 만든 소상(塑像)이 있었는데 건물과 함께 철거됐다. 대한제국기 선교사들이 주물(呪物)을 소각하고, 당집을 파괴하는 것과 비슷했다. 사찰이나 성황당은 다른 종교 영역이니 그렇다고 치자.
     
    1574년(선조7), 황해도 개성 유생들의 상소가 올라왔다. 옛 성균관에 공자와 제자들의 상을 철거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은 철거됐고 공자 소상도 땅에 묻혔다. 그 자리는 신주(神主)가 대신했다. 숭배 대상에 대한 최소화·추상화이다. 조선에는 중국 산둥 지방 곡부(曲阜)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공자상이 없었다.
     
    하지만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사람이다. 아프면 의원을 찾고 그래도 안 되면 굿을 한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집안에 우환이 계속돼도 푸닥거리를 한다. 가뭄은 온 세상이 당하는 재난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고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싶은 일이 어딘들 누군들 없겠는가. 무당이 굿을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든, 무릎 꿇고 기도를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든, 상을 차려놓고 두루마기 차림에 절을 하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닥쳐 인간이 무한=초월자에게 바치는 승복 의식임에는 차이가 없다.
     

    전북 부안 개암사 대웅전. 불교를 억압한 조선에서도 불교의 불씨는 계속 내려왔다. [중앙포토]

    전북 부안 개암사 대웅전. 불교를 억압한 조선에서도 불교의 불씨는 계속 내려왔다. [중앙포토]

    나라에는 사전(祀典), 즉 제사 제도가 따로 있었다. 큰제사, 중간제사, 작은 제사로 나뉘는데, 종묘나 사직에 지내는 제사가 큰제사, 풍운뇌우(風雲雷雨)에 지내는 게 중간제사, 명산과 대천에 지내는 제사가 작은 제사였다. 음사란 여기에 들어가지 못하는 제사를 말한다.
     
    사람들이 여전히 음사를 지내던 조선 전기, 그 제사의 주관자는 무당이었다. 이경여가 지낸 기우제는 원래 무당의 몫이었다. 『용재총화(慵齋叢話)』를 보면 한양 기우제에는 모든 주민이 참여한다. 누각에서 아이들이 비를 불렀다. 사방에 용의 그림을 걸고 오룡제를 지낸다.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호랑이 머리를 강에 던져 넣는 침호두(沈虎頭)를 거행했다. 용의 천적인 호랑이 머리를 넣어 자극한 것이다. 다음에는 작은 용인 도마뱀을 항아리에 띄워 괴롭힌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조상에게 올린 가장 큰 제사 의식인 종묘 제례. [뉴스1]

    조선시대 왕실에서 조상에게 올린 가장 큰 제사 의식인 종묘 제례. [뉴스1]

    관원들은 구경만 한다. 비를 비는 것은 무당이다. 서서히 무당의 기우제에 대한 반감이 생겼다. 표준 유교 제사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경여의 기우제는 무당의 업무를 지방관이 대체한 것이었다. 초월적 힘에 대한 접속에 굳이 무당을 끼워 넣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 이왕이면 그 접속 권한도 가져오고 싶었을 것이다. 공식 종교 행사에서는 그랬지만 여전히 무당이나 신을 모욕했다가 망신당한 이야기도 전해졌다. 특히 민속 종교 행사에서 무당의 접신권은 여전했다.
     
    장면 2를 보자. 대학 시절, 답사 갔던 사찰 상당수가 숙종~영조, 정조 연간에 중건됐다는 걸 발견했다. 성리학이 경직화했다고 배운 시기인데, 사찰 중건이라니…. 조선시대 전자문화지도 DB를 만들며 내 기억은 수치로 증명됐다. 현존하는 사찰의 3분의 2가 조선 후기에 중건됐다. 예를 들어 강화 전등사(傳燈寺)는 1625년 중건됐고, 남양주 봉선사(奉先寺)는 1749년(영조25)에, 서산 개심사(開心寺)는 1644년(인조22)과 1710년(숙종36)에 중수됐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가 바뀐 것은 ‘사회=세상의 재조정’이었다. 그 한복판에 역사적 수명을 다했던 불교 사찰이 있었다. 탈세, 면세, 평민과 노비의 투탁으로 사회의 재생산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 사찰 개혁의 이유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사찰로 갔고, 문화센터 역시 사찰이었다. 죽음이라는 절대 한계를 가진 존재에게 불교의 천당-지옥 프레임은 압박이 아닐 수 없었다. 대략 100년 정도 이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세미나가 계속 열렸다.
     
    경연(經筵)의 역사 공부는 주로 불교 비판에 할당됐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이래 불교를 숭상한 군주였던 양무제(梁武帝)는 황금 불상 등 막대한 불사(佛事) 비용 때문에 자주 비판 대상이 됐다. 불교의 허황함에 대한 자료였던 셈이다. 그러면서 내내 죽은 뒤 지옥에 떨어질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가끔 불상이 땀을 흘리거나 돌아앉는 등 괴이한 일이 벌어지면 더 그랬다. 그래서 지옥도 없다, 윤회도 없다, 죽으면 기(氣)는 흩어져 땅으로 공중으로 사라진다, 외우고 또 외우면서 서로 용기를 주었다.
     
    조선 궁궐에서 서서히 사라진 불상
     
    서서히 조선 궁궐 경내에서 불상이 사라졌다. 지은 죄가 커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호불(好佛) 군주 세조는 왕실 불사를 빠짐없이 챙겼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이후 한양과 조정에서 불교가 얼굴을 내민 것은 명종 때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승려 보우(普雨)가 활동한 것이 거의 유일했다.
     
    조선 초기 세상을 재편하려는 사람들은 불교를, 정확히 말하면 사찰을 세상의 중심에서 쫓아냈다. 이것이 중국·베트남·일본 사회와 다른 점이었다고 한다. 이들 사회에선 유교·불교·도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공식 종교 영역에 포괄됐다. 적어도 조선은 국가 종교 영역에서는 이 진단이 맞다. 한데 사회 일반에서 보면 상황이 다르다. 지금 살펴본 2번 사례, 조선 후기 사찰의 대거 중건이 증거다.
     
    이 주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왜란과 호란을 거친 뒤 대동법, 중·일 중계무역 등으로 민생이 안정되고 부(富)가 축적된 것도 배경이 됐을 것이다. 지역 부호들의 지원이 있었으리라 예상되지만, 사대부 가문에서 지원한 사례도 적잖게 발견된다.
     
    원래 종교적 요소가 적은 유교의 현실주의와 사회적 요소가 적은 불교의 초월주의는 그다지 겹치지 않는다. 또 유교와 불교는 도교의 신선술이나 무당의 기복 종교와 크게 대립할 것도 없다. 겹치는 부분은 포섭되거나 포섭하면서, 겹치지 않는 영역은 각자 서원에서 사찰에서 따로 살았다. 유럽 계몽주의-기독교와 만나기 전까지.
     

    천주교가 탄압 받은 까닭

    사찰 중건이 수그러들던 1801년(순조1), 천주교인에 대한 대규모 탄압이 있었다. 많은 천주교인이 체포됐고, 300여 명이 처형당했다. 영화 ‘여왕 마고’의 소재였던 프랑스 구교도의 신교도 학살이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전투기 공습 같은 종교전쟁(탄압)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간 조선 사회의 경험에서 볼 때 이런 규모의 종교 탄압은 놀라운 일이었다.
     
    발단은 조상 제사와 관련이 있었다. 원래 중국에 들어왔던 마테오 리치의 예수회는 조상에 대한 의례를 그리스도교와 배치된다고 보지 않았다. 그러나 도미니크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위패 모시는 일도 우상숭배로 매도했다. 이른바 전례(典禮) 논쟁이다.
     
    천주교를 자생적으로 받아들인 조선의 신자들은 18세기 후반에야 조상 제사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청나라에 남아 있던 선교사는 조상 제사를 배격하는 인물들이었다. 그 영향으로 정약종은 예수회와는 달리 위패를 버리고 천주의 상을 택했다. 신유교옥(辛酉敎獄)은 그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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