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의 이코노믹스] 산업·통상·안보 연계된 민주주의·기술동맹 눈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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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공급망 재편 나선 바이든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

    올해 2월, 미국무역위원회(ITC)가 LG의 손을 들어주면서 SK가 추진하던 미국 조지아주 전기차 배터리 공장이 좌초위기에 처하자 바이든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차세대 자동차의 미래인 전기차의 핵심요소인 배터리 공급에서 LG만 남는다는 것은 공급망의 안전성과 탄력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아니면 중국산 배터리에 주도권을 넘겨줄 판이었다. ITC 결정을 뒤집고 바이든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지만, 그 역시 정치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LG와 SK 간의 합의를 끌어내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막판까지 치열한 협상 끝에 거부권 행사 시한 직전,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졌다. LG는 거액의 합의금을 받았고, SK는 미국 내 생산기지를 확보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압박이 없었다면 이런 ‘윈-윈’(win-win) 합의는 쉽지 않았을 수 있다.
     

    중국 자체 기술 확보 꿈꾸고 나서자
    미국이 세계 공급망 재편으로 대응
    바이든의 공급망 검토 보고서 임박
    외국 끌어들여 미국 생산기반 확충

    바이든은 왜 합의를 압박했을까? 키워드는 조지아와 중국이다. 조지아주가 바이든 민주당 행정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상, 그 이상이다. 공화당에서 밀리던 상원에서 민주당이 역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지아 주 2명의 상원 의석을 모두 민주당이 가져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민주당은 백악관과 의회를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집권 초기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냈다.
     
    중국은 왜 문제가 되나? 지난 2월 24일,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전기차) 배터리·희토류·의약품 4개 분야의 공급망(supply chain)을 검토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 4개 분야는 중국산의 비중이 큰 분야다. 취임 후 한 달이 막 지난 시점에서 내려진 이 지시는 전격적인 듯하지만, 이미 준비된 수순이었다. 시계를 잠시 뒤로 돌려보자.
     

    최병일의 이코노믹스 그래픽=신용호

    최병일의 이코노믹스 그래픽=신용호

    2020년 대선 유세과정에서 바이든은 중국의 시진핑 주석을 맹비난했다. 홍콩 민주화 시위 무력진압, 신장 위구르 인권 탄압을 거론하면서 ‘폭력배’라고 거칠게 몰아세웠다. 바이든은 모든 국제관계를 돈으로 환산하던 트럼프보다 훨씬 더 원칙적이다. 그는 트럼프가 쓰레기통에 던졌던 가치(value)를 복원시키고 있다. 트럼프가 한 번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던 ‘인권’이란 단어를 바이든은 대통령 취임 후 시진핑과의 최초 만남- 2시간을 훌쩍 넘긴 전화통화 -에서 주저 없이 꺼냈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바이든은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국가들과 연합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미국에 무역수지 적자를 안겨주는 국가를 싸잡아 맹공하던 트럼프 시절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바이든의 이런 행보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2차대전 후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가치를 앞세워 동맹을 결속하던 미국 외교의 정공법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동맹과 연합 없이 미국의 힘만 믿고 일방적으로 중국 때리기에 골몰하던 트럼프가 중국은 벌써 그립다. 미국의 최대 동맹이던 유럽은 트럼프의 저열한 거래적 외교에 경악했고 환멸을 느꼈다. 굳건하다고 믿었던 대서양 동맹은 흔들렸다. 중국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중국은 트럼프에게 최소한의 양보를 조금씩, 천천히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깊게 참호를 파고, 참고 기다리자. 그 사이에 세상은 싸고, 품질마저 나쁘지 않은 중국산 첨단기술의 매력에 도취해 있을 것이리라. 시간은 중국 편이다.” 중국의 게임 플랜이었다.
     
    정공법을 꺼내 든 바이든이지만, 신병기 없이는 정공법이 효과를 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의 신병기는 무엇일까? 중국산에 중독된 세계 공급망을 그대로 두고 패권경쟁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바이든과 핵심참모들의 생각이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비결은 기술 때문이 아니다. 압도적인 인구의 압박과 저개발 경제의 이중주가 만들어 내는 저임금 때문이다. 원천기술을 가진 외국기업은 자국에서 생산하는 경우와 비교하면 믿을 수 없는 비용만 지불하면 제품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경악했다. 비현실적으로 싼 임금으로 생산 규모를 순식간에 확장할 수 있다는 또 다른 발견에 쾌재를 불렀다. 중국으로의 생산설비 이전과 확장은 세계화가 기술을 가진 선진국 기업에 내린 축복이었다. 축복의 과실은 중국도 나눠 가져갔다. 역사상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규모의 빈곤탈출! 21세기 초반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을 추월할 기세다.
     

    여전히 압도적인 미국의 기술 패권

    여전히 압도적인 미국의 기술 패권

    양은 질을 바꾼다고 했던가? 중국경제의 성장, 팽창은 중국에 다른 꿈을 꾸게 하였다. 선진국 기술에 의존해서 조립하는 경제에서 스스로 기술을 확보하겠다는 꿈. 중국 자본은 미국의 실리콘 밸리로 몰려갔다. 다른 경쟁투자자의 세 배를 주겠다는데 버틸 장사가 있을까. 그렇게 중국은 기술을 끌어모았고, 기술자를 확보했고, 브랜드를 쓸어 담았다. 중국의 본격적인 기술 굴기가 시작되었다. 생산기반에다 기술까지 가진 중국. 미국은 그런 중국을 상대할 수 있을까.
     
    바이든의 핵심분야 공급망 검토 보고서는 며칠 후(6월 초로 예정), 그의 백악관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일 것이다. “미국의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국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행정명령 서명식 때 바이든의 공언은 이미 보고서의 방향을 예견하게 한다.
     
    바이든은 무역·산업·안보 연계 정책을 들고나올 것이다. 20세기 후반을 풍미하던 산업정책과 닮은 듯하지만 다르다. 기존의 산업정책은 외국산을 배제하고 국산을 육성하기 위한 방어적 보호주의라면, 바이든의 산업정책은 외국산을 끌어들여 국내 생산기반을 확충한다는 것이다.
     
    기존 산업정책은 가격이 높더라도, 품질이 조악하더라도 국산에 기회를 주는 것이다. 무수한 개도국 정치인들은 자국산 제조기업을 가진다는 것을 자신의 정치적 상징으로 밀어붙였다. 결과는 참혹했다. 폭우처럼 내리는 보조금과 외국산 금지로 국산은 시장에 넘쳐났지만, 세계와의 격차는 메꿀 수 없었다. 조악한 국산을 계속 안고 가야 하는 비용은 눈덩이처럼 부풀어갔다. 이렇게 탄생한 국산기업은 노동자·자본·공급체·지역사회의 클러스터를 형성하면서 기득권화돼 갔다. 일본과 한국의 경우는 예외적인 사례일 뿐이다. 그 성공비결은 산업정책으로 확보한 국내생산의 기회를 더 큰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으로 연결했기 때문이다. 정책이 초기여건을 만들어 주었다면, 그 후의 성공은 결국 기업가 정신의 산물이었다.
     
    바이든 산업정책의 본질은 미국의 생산능력 확보를 통해 미·중 패권경쟁에서 흔들리지 않는 전략적 우위 확보다. 바이든의 산업정책 목표는 미국기업 보호·육성이 아닌 미국 내 생산기반 구축이다. 국산기업에 대한 보조금과 수입금지가 아닌, 미국 내 투자유치가 핵심수단이다. 모든 투자가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외국 돈의 색깔을 차별한다. 푸른 돈만 환영하고 붉은 돈은 배제한다. 색깔의 구분은 가치와 동맹이다. 2021년 여름, 세계는 산업-통상-안보가 연계된 기술동맹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다.
     

    미국·유럽 기업, 생산 자립화 본격화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는 한국·대만·일본·중국이 주요 공급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반도체의 경우, 이들은 세계 반도체 생산의 80%를 차지한다. 원천기술을 미국이 가지고 있다 해도 생산을 외국에 의존하는 한, 예상하지 못한 자연재해, 보건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경제활동에 심각한 차질이 생긴다는 것은 최근의 코로나 팬데믹 사태, 텍사스 한파를 겪으면서 분명해졌다.
     
    전 세계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글로벌 공급망의 효율성을 종교적 신앙처럼 떠받들던 미국 기업들의 저항도 한풀 꺾였다. 중국의 진격 속도와 미국을 추월하려는 야심이 그들을 미국 깃발 아래 뭉치게 하고 있다. 기술만 믿고 생산기지를 해외에 이전하던 미국 기업들은 그들의 유전자에는 없었던 ‘자립화’란 단어를 이식하기 바쁘다. 기술의 아이콘 인텔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에 다시 진출한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디지털 혁명에서 비켜 있던 유럽도 자립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유럽산의 점유율을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자립화의 새로운 물결은 반도체를 넘어 전기차로 이어진다. 전기차 보급이 확대되면서 EU는 배터리의 해외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폭스바겐은 2023년부터 전기차 배터리를 아예 자체 생산하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2030년에는 그들 전기차의 80%에 자체 배터리를 적용하겠다는 그림을 그렸다. 배터리 공장을 유럽 내에 건설하겠다는 것은 큰 그림의 일부다.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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