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 논설위원이 간다] 흔하다고 가치 없나? 스마트폰은 이 시대 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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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대전화를 뜯어보면 한국 경제사를 알 수 있다. 휴대전화는 우리 시대를 보여주는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왼쪽부터 최초 국산 휴대전화, 세계 첫 MP3 뮤직폰, 세계 첫 카메라 내장폰, 세계 첫 TV폰, 세계 첫 손목시계폰. [사진 폰박물관]

    휴대전화를 뜯어보면 한국 경제사를 알 수 있다. 휴대전화는 우리 시대를 보여주는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왼쪽부터 최초 국산 휴대전화, 세계 첫 MP3 뮤직폰, 세계 첫 카메라 내장폰, 세계 첫 TV폰, 세계 첫 손목시계폰. [사진 폰박물관]

    스마트폰은 이 시대의 부처다. 하루 24시간 우리와 함께한다. 스마트폰이 없는 세상은 이제 상상하기 어렵다. 서양화가 황주리(64) 개인전 ‘그대 안의 붓다’(8일까지 서울 노화랑)에도 스마트폰을 든 부처가 여럿 등장한다. 캔버스·돌·접시·시계 등에 먹고, 자고, 사랑하고, 기도하는 현대인의 하루하루를 담은 그림 곳곳에 황 작가는 스마트폰을 슬쩍 끼워 넣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도 생각난다. 1960년대부터 ‘TV 부처’ 연작을 내놓은 그에게 텔레비전이 부처라면, 21세기 호모 모빌리쿠스(Homo Mobilicus)에게 스마트폰은 부처와 다름없다. 한낱 전자부품 뭉치인 스마트폰이 우리를 기쁘게, 화나게, 슬프게, 즐겁게 하고 있다.

    경기 여주에 세계 유일 폰박물관
    이병철씨, 3000여점 모아서 기증
    통신강국 한국의 발자취 보여줘
    지속적인 유물 수집·연구 숙제로

    서양화가 황주리가 그린 '그대 안의 붓다'.

    서양화가 황주리가 그린 ‘그대 안의 붓다’.

     스마트폰의 역사는 길지 않다. 휴대전화 원조로 꼽히는 무선 송수신기 SCR-536(일명 핸디토키)을 미국이 선보인 건 1941년, 올해로 꼭 80년이 됐다. 국내에 휴대전화 서비스가 시작된 건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이다. 이전엔 안보를 이유로 이동통신을 민간에 널리 개방하지 않았다. 국산 첫 휴대전화는 삼성에서 미국 제품을 가져다 개발한 SH-100이다. 올림픽을 맞아 우리 기술력을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 전화기는 한국에서 구할 수 없다. 올림픽 개막식 당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47명에게만 증정됐기 때문이다. 일반인용(SH-100AㆍSH-100S)은 이듬해 출시됐다. 당시만 해도 휴대전화를 쓰려면 무선국 허가를 받아야 했다. 주민등록증만한 허가증이 필요했다. 88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쓰인 외국 휴대전화가 500만원 대였는데, 국산 첫 휴대전화는 165만원이었다.  
     경기도 여주시에 세계 최초, 세계 유일의 별난 박물관이 있다. 폰박물관이다. 현재 시립으로 운영되지만 박물관 산파는, 아니 산모는 이병철(70) 전 폰박물관장이다. 20여 년 수집한 휴대전화 3000여 점을 2016년 여주시에 기증했다. 폰박물관에서 그를 만났다.  
     이씨는 2000년부터 휴대전화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집에 보관해온 아날로그 휴대전화가 어느 날 눈에 띄지 않았다. 서울 황학동 벼룩시장을 뒤졌으나 똑같은 모델을 찾을 수 없었다. “이것도 산업문화 유산인데, 놔두면 다 없어지겠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있는 돈 없는 돈 들여 휴대전화를 모았다. 각종 잡지·인터넷 정보를 찾으며 휴대전화 역사와 발전도 공부했다. 2008년 여주 자택에 사립박물관 형태로 처음 열었다.

     “2007년 국산 첫 상용 휴대전화 SH-100A를 구하며 박물관 설립을 결심했습니다. 무려 여섯 번 시도한 끝에 손에 넣었어요. 한국에 없는, 외국에 수출한 국산 휴대전화와 외국산 전화도 빠뜨리지 않으며 양과 질 모두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박물관을 열었습니다.”

     이씨는 현대판 고고학자를 자부한다. 땅속에 묻힌 오랜 유물을 발굴하는 사람만이 고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른바 산업고고학이다. 지금은 너무 흔해, 쉽게 버리는 것도 시간이 흐르면 물시계·해시계처럼 국보·보물이 될 것으로 믿는다. 
     “현대인을 이해하려면 메소포타미아 점토판이 아니라 산업혁명 이후의 기계부터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선진국에선 다양한 산업기술박물관을 만들어 공장·철도·자동차 등 산업유산을 보존합니다. 반면 우리는 광복 이후 산업유산 가운데 무려 45%가 사라졌어요. 80년대 이후 우리 삶을 가장 크게 바꾼 게 휴대전화입니다. 단군 이후 우리가 만든 물건 가운데 세계인이 가장 많이 쓰는 게 휴대전화죠. 우리가 1등이니 가장 한국적인 것이요, 세계인이 보편적으로 쓰니 가장 세계적인 것 아닌가요.”

    20세기 후반 최고 발명품인 휴대전화의 모든 것을 정리해온 이병철 전 폰박물관장. 박정호 기자

    20세기 후반 최고 발명품인 휴대전화의 모든 것을 정리해온 이병철 전 폰박물관장. 박정호 기자

    경기도 여주 폰박물관 바깥에 세워진 조형물. 왼쪽부터 스마트폰 시대를 활짝 연 아이폰 2G, 원조 휴대전화 핸디토키, 세계 첫 MP3 뮤직폰. 박정호 기자

    경기도 여주 폰박물관 바깥에 세워진 조형물. 왼쪽부터 스마트폰 시대를 활짝 연 아이폰 2G, 원조 휴대전화 핸디토키, 세계 첫 MP3 뮤직폰. 박정호 기자

     이씨는 유물만 모은 게 아니다. 각 물건의 내력을 공부했다. 기계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땀과 정성을 캐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 휴대전화 하나하나 사연이 없는 게 없다. 2년 전 그가 낸『수집가의 철학』은 전화로 본 한국 현대사쯤 된다.

     일례로 그는 2008년 우연히 인터넷에서 삼성 폴더형 SCH-800 회로기판에 적힌 ‘할 수 있다는 믿음’ 일곱 글자를 발견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나온 기기다. 그가 동일 모델을 분해해 보니 역시 같은 문구가 있었다. “처음에는 외환위기 극복 의지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수출품에는 해당 글귀가 없었어요. 그 미스터리를 풀어봤습니다. SCH-800보다 2년 전 먼저 출시돼 히트한 모토로라 스타택을 뛰어넘겠다는 무명 엔지니어들의 열정이었어요. 그런 믿음이 오늘날 휴대전화 강국을 만든 힘이 아닐까요. 이후 세계 최초의 최소형 폴더, 듀얼 폴더, MP3 뮤직폰, 카메라 내장폰, 손목시계형 전화, TV폰등을 잇달아 내놓았으니까요.”

     이씨가 모은 유물은 감정가 30억원에 이른다. 여주에 앞서 2014년에는 울산시에 2000여 점을 내놓았다. 울산에 들어설 산업박물관에 기증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며 산업박물관 건립은 유야무야 됐다. “울산 기증품은 현재 울산박물관 창고에 있어요. 문화는 정치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 10위권 경제국가인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이지요.”

     그는 지난 4월 폰박물관장에서 물러났다.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했으나 박물관에 막상 설립 주체를 기억하는 증표 하나 없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했다. “여주시 요청으로 공채 관장으로 일했어요. 휴대전화 전문가가 없어 앞으로 박물관이 어떻게 운영될지 걱정이 큽니다. 급속하게 진화하는 유물을 계속 구입해야 하는데 예산이 거의 없거든요. 시장이 바뀔 때마다 박물관 정책도 흔들리고요. 이래서야 누가 박물관을 만들어 사회에 기증하겠습니까.”

     이씨는 우리 말과 글에도 관심이 많다. 국어사전을 도반(道伴)으로 여겨왔다. 잡지·신문 기자 출신인 그는 시사주간지에서 교열·편집 책임자로 오래 일했다. 우리 말글의 오용을 시대·분야별로 훑은『모국어를 위한 불편한 미시사: 앙꼬빵 곰보빵 빠다빵』도 최근 냈다. 소통 측면에서 스마트폰과 겹치는 부분도 있다.

     “스마트폰은 양날의 검입니다. 한국어를 무너뜨리는 역기능도 커요. 글은 인간의 정신과 얼입니다. 문장은 완전해야 하고요. 가장 중요한 게 어휘죠. 실생활에 사용되는 단어가 20만에 이릅니다. 단어 단어의 뉘앙스를 살렸으면 해요. 스마트폰 짧은 메시지로는 구현하기 어렵죠. 독서가 죽으면 좋은 글이 나올 수 없고, 우리 문화도 성숙할 수 없습니다.”

     폰 박물관 끄트머리, 전시 공간 일부가 비어 있다. 휴대전화 소개가 2018년에 멈춰 있다. 혹시라도 박물관이 2018년에 정지되는 일은 없어야 할 터다. 세상은 벌써 5G(세대)를 넘어 6G로 달음박질치고 있지 않은가. 

    고종 전화 덕분에 목숨 건진 백범

    스웨덴 에릭손사 자석식 전화기. [사진 폰박물관]

    스웨덴 에릭손사 자석식 전화기. [사진 폰박물관]

    백범 김구(1876~1949)는 전화 때문에 살아났다? 그렇다. 백범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일본군 장교를 때려죽였다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고종이 인천 감옥에 급히 전화를 걸어 사형을 면하도록 지시했다. 사형 선고 사흘 전 개통된 한성~인천 전화 덕분에 백범은 목숨을 건졌다.  
     
     당시 고종이 사용한 전화기는 스웨덴 통신회사 에릭손이 만든 자석식 전화기(사진)다. 가로 30.4㎝, 높이 78㎝, 두께 22㎝ 벽걸이형이다. 폰 박물관에서 실물을 볼 수 있다. 이병철 씨는 “고종 때 왕실에서 스웨덴제 벽걸이 전화기와 교환기를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스웨덴에서 해당 모델을 구해왔다”고 말했다.  
     
     한국인이 처음 전화를 사용한 기록은 1882년 중국 톈진에 신문물을 배우러 간 김윤식의 일기에 나온다. 어화통(語話筒)이라고 썼다. 이후 전화기는 덕률풍(德律風·텔레폰), 전어기(傳語機)로 불렸다. 이씨는 “조선 말기의 풍운은 전화기에도 담겨 있다. 스토리 텔링이 풍성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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