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호텔이 아닌 호텔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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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심정도 애달프겠다. 그러나 파랗지 않은 걸 파랗다는 것도 기이하기는 하다. 박물관의 조명 아래 반짝이는 저 물건의 이름은 청자다. 그러나 이리 돌아보고 저리 굽어보아도 저것은 분명 청(靑)색이 아니고 녹(綠)색에 가깝다. 교과서에는 비색이라 쓰여있으되 그렇다고 고려 비자라 부르지도 않는다.
     

    건축은 사유물이지만 사회적 자산
    용도 변화로 철거 논의, 힐튼호텔
    80년대 한국건축계의 중요 성취
    철거 아닌 개보수의 상상력 필요

    사실 우리에게 파란(blue)색과 푸른(green)색은 넘나드는 단어다. 오월이면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이라고 노래하는데 이 두 ‘푸른’은 정녕 다른 색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고 들판에 청보리가 가득하다는데 막상 그건 청색 아닌 녹색 식물들이다. 좋게 말하면 유연한 언어 사용이고 꼬집어 말하면 색채 무감각이다. 구분하고 정리할 때는 되었다.
     
    이승의 한 줌 흙이 지옥 불에 연마되어 불사조 깃털처럼 사뿐하게 환생하니 비물질적 우아함, 그것이 청자다. 청자는 용도도 궁금하다. 고려말에 청자부장품 묻은 이들이 사용설명서까지 무덤에 넣지는 않았다. 대개 형태로 용도를 유추하나 모호한 것들도 즐비하다. 그래도 여전히 청자고 문화재다. 용도로만 가치를 따진다면 그때 청자는 한낱 그릇일 뿐이다.
     
    용도를 초월한 아름다움의 가치를 묶어 예술로 규정한 것은 18세기 유럽의 철학자들이다. 그래서 아무 데도 쓸모없는 음악이 예술의 정점에 올라 찬미되었다. 그 벼슬군의 미관말직에 건축이 간신히 발을 걸치고 있었다. 용도 없는 건물은 상상하기 어려우니 예술 경계의 애매한 위치였다. 어찌 되었건 도시에 솟은 멋진 건물들, 그걸 ‘아키텍처(architecture)’라고 불렀다.
     
    메이지시대에 일본인들은 생소한 단어들에 실린 유럽의 새로운 사고체계를 만났다. 거기 ‘아키텍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건 자신들이 만들던 일상적 건물과 다른 가치를 담은 단어였다. 당시 일본에서 집 짓는 것은 조선(造船)과 짝을 이루어 조가(造家)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아키텍처’를 번역할 신조어가 필요해졌으니 그 결과물이 ‘건축(建築)’이었다. 동아시아 공통어인 건축이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건물과 건축의 구분 선은 무얼까. 그 구분은 단어 본고장 유럽에서도 여전히 모호하다. 내가 긋는 선은 이렇다. 용도가 사라졌을 때 철거가 마땅하다면 건물이다. 용도가 사라져도 존재의 가치가 있으면 건축이다.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 철거를 애달파하지 않은 것은 그것들이 건물이라는 증언이다. 조선총독부청사가 철거될 때 수많은 논쟁이 있었던 것은 그것이 건축이었기 때문이다.
     
    공간으로 해석한 사회를 도시에 새겨 역사의 증언자로 남기는 작업, 그게 건축의 가치다. 그래서 건축은 사회적 작업이다. 1980년대 한국 건축의 화두는 전통이었다. 그것은 한국의 정체성이 어떻게 건축으로 구현되겠느냐는 질문이었다. 기와집뿐 아니라 백자와 청자까지 건축형태 추출의 근원으로 호명되기도 했다. 가장 즉물적인 대답은 독립기념관이었고 가장 추상적인 번역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기존 한국건축과 담론의 궤가 다른 건물이 서울 한복판에 세워졌다. 훨씬 더 긴 호흡에서 건축의 영속적이고 근원적인 가치를 묻는 건물이었다. 그건 파르테논신전부터 부석사 무량수전을 가로지르는 공간비례, 구조표현과 같은 추상적 주제에 대한 천착의 결과였다. 그 건물이 남산 중턱의 힐튼호텔이다.
     
    호텔은 기능이 복잡다단하다. 그런 조건을 맞춰 설계해 나가다 보면 건물 형태도 복잡해진다. 그런데 이 건물은 그 조건들을 심지어 산 중턱이라는 경사 조건까지 맞춰 간단명료한 상자 안에 다 풀어냈다. 게다가 그 큰 덩치를 사뿐하고 날렵한 비례로 빚어낸 것이다. 모서리를 살짝 꺾은 것은 최고의 비례를 찾는 신의 한 수였다. 전혀 다른 차원의 우아함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무상하니 경제 상황의 부침 따라 이 건물의 소유자도 바뀌어왔다. 그래도 여전히 힐튼호텔이었다. 그런데 이번의 새로운 소유자는 수요 없는 호텔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한듯하다. 철거부터 용도변경까지의 가능성을 알려주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사회가 바뀌면 건물도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용도 따라 내부를 개보수하는 건 당연한 일상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건축적 상상력이다. 서글픈 건 이게 부동산일 뿐이라는 가치관이고 가장 끔찍한 미래는 철거다.
     
    더는 호텔이 아닌 이것을 앞으로 호텔이라 부를 수도 없겠다. 그럼에도 이 건물은 존재의 가치가 있다. 이건 건물이 아닌 건축의 성취다. 우리는 그간 수많은 건물을 거침없이 부숴왔다. 그것들이 건축적 가치를 지녔는지 묻지 않았다. 백 년 걸려 짓는다는 스페인의 건물을 칭송해왔지만 우리는 백 년도 되지 않은 건물들을 철거해왔다. 쓸모없어졌다고 청자를 다 깨서 버렸다면 지금 우리의 박물관은 공허했을 것이다. 건물은 사적 재산이지만 건축은 사회문화적 자산이다. 철거가 건축의 종말이면 우리의 도시도 공허해질 것이다. 우리의 역사도 공허해지고.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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