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의 시시각각] 재난지원금이라는 낡은 레퍼토리

최근 게시물 게시판 뉴스이슈 [이현상의 시시각각] 재난지원금이라는 낡은 레퍼토리

  • 정부의 영업제한 등 행정명령으로 인한 자영업자·손실 보상 소급 입법이 늦어지고 있는 가운데 여당은 대규모 추경을 통한 전국민 재난지원금 카드를 또다시 꺼내 들었다. 서울 중구 명동 거리 상가에 붙은 임대 현수막. [뉴스1]

    정부의 영업제한 등 행정명령으로 인한 자영업자·손실 보상 소급 입법이 늦어지고 있는 가운데 여당은 대규모 추경을 통한 전국민 재난지원금 카드를 또다시 꺼내 들었다. 서울 중구 명동 거리 상가에 붙은 임대 현수막. [뉴스1]

    갓 태어난 오리는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여겨 졸졸 따라다닌다. 각인 효과 때문이다. 특정 시기에 일어난 학습 효과는 평생 간다. ‘결정적 시기’라고 부르는 특별한 학습 시기는 동물마다 다르다. 오리는 부화 후 36시간, 거위는 48시간이라고 한다.
     

    ‘돈 선거’ 추억이 너무 달콤했나
    세계는 인플레이션 긴장하는데
    세수 좀 남는다고 냉큼 쓸 생각만

    재난지원금 문제에 있어 여당의 결정적 시기는 지난해 총선이었다. 민주당은 소득 하위 70% 지급을 주장하던 정부를 압박해 전 국민 대상으로 넓혔고, 그 결과 180석 당선 압승을 거뒀다. 몇 달 뒤 2차 재난지원금 때 민주당은 선별 지급 입장으로 돌아섰다. 일관성 부족이라는 지적에 당시 한정애 정책위원장은 “전 국민 지급은 일정 부분 선거 논리였다”고 실토했다.

     
    재정을 이용한 ‘돈 선거’ 경험이 말랑말랑한 새끼 오리의 뇌에 새겨진 첫인상마냥 강렬했던 모양이다. 간단하고 쉽기까지 했다. 여당은 자영업자 손실보상 소급 같은 골치 아픈 문제에선 소극적이었다. ‘중복 지원, 형평성, 집행과 정산의 기술적 어려움’ 등을 이유로 빼는 정부의 뒤에 숨었다. 그러나 전 국민 재난지원금에는 적극적이다. 대통령이 “추가 재정 투입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고 운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 움직인다. 골치 아플 일 없이 생색내기 딱 좋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천조국'(국가 채무 1000조원 나라) 비아냥까지 듣는 재정 형편을 들먹여 봤자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시기와 방식만은 지적하고 싶다. 집단면역 형성은 아직 멀지만, 경제 현장은 이미 ‘보복 소비’ 열풍이다. 한국은행은 올 성장률 전망을 4%로 올려 잡으며, 인플레이션 우려에 금리 인상 가능성까지 비쳤다. 5월 소비자물가(2.6% 상승)는 9년여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올랐다. ‘으쌰으쌰 힘을 내자’는 위로금 따위가 없어도 시장은 오히려 거품과 과열을 경계해야 할 정도로 내달리고 있다. 물론 어려운 부문은 여전히 있다. 하지만 이는 맞춤형 진단과 처방으로 해결할 문제지, 전 국민 위로금으로 해결할 성격은 아니다.
     
    코로나 국면에서 재정 확대는 불가피했지만,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이제 슬슬 나오고 있다. 6조 달러의 초대형 재정정책 실행에 들어간 미국이 그렇다. 로런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 올리비에 블랑샤르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규모 소득 보전 경기부양책이 예상을 뛰어넘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과감한 재정 확대를 옹호해 왔던 인사들의 말이라 더욱 눈길이 간다.
     
    세계는 그동안 한껏 풀었던 돈의 수도꼭지를 조일 시기를 재고 있다. 이런 판에 우리는 최대 30조원이 넘는 ‘수퍼 추경’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시중 채권 금리는 완만하지만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수퍼 추경을 위해 대규모 적자 국채를 발행하면 국채 가격 하락에 금리 불안까지 부를 수 있다.

     
    올해 세수가 예상보다 더 걷혀 별 부담이 없다는 것이 여당의 논리다. 이 돈이 어떤 돈인가. 무능한 정책으로 다락같이 올려놓은 부동산에서 빨아들인 세금이다. 치열한 국내외 경쟁을 헤쳐온 기업들의 땀에 젖은 돈이다. 자기 주머닛돈 같았으면 개암 까먹듯 나눠 털어먹자는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선거를 앞두고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갖다 붙여도 염치없는 일이다. 여유가 있으면 방역 일선에서 희생을 도맡았던 자영업자, 불안한 미래에 떠밀리는 청년, 자꾸만 밀려나는 저소득층 지원을 위해 분별 있게 써야 한다. 그게 공정이고 정의다.
     
    선거 때마다 이런저런 구실로 돈을 뿌려 표를 노리는 행위는 이미 식상하다. 효과도 의문이다. 지난 4·7 재·보선을 앞두고 부랴부랴 결정된 4차 재난지원금 지급은 선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서울시장에 출마했던 여당 후보는 재난지원금 10만원을 약속했지만, 유권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죽비를 맞고도 각인된 허상에 매달려 낡은 레퍼토리를 또 들고나오는 여당의 학습 능력이 의심스럽다.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Source link

    신고하기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