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한국의 기술혁신, 인내자본에 달려있다

최근 게시물 게시판 뉴스이슈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한국의 기술혁신, 인내자본에 달려있다

  • 퍼스트무버로 가는 길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오래전부터 한국의 자랑스러운 기술들을 만들어낸 과학기술자와 기업인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분투기를 듣고 메모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CDMA 개발의 지휘자, KTX의 산파, 신약 개발 개척자들이 들려주는 실패와 성공의 드라마는 웬만한 무협지보다 더 재미있다. 분야는 다르지만, 공통점도 많은데, 그중 하나가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성과 없이 보낸 오랜 시간이다.
     

    성공한 혁신 이면엔 오랜 시련 있어
    스페이스X도 13년 시행착오 경험
    국내 혁신생태계 인내자본 말라 가
    인내자본 위한 국가적 대책 만들때

    액정평판디스플레이(LCD)만하더라도 1987년 당시 금성사가 연구원 다섯명으로 처음 기술개발을 시작한 후 무려 8년이 지나고서야 첫 제품을 출시했다. 그러나 그 이후 4년간 내리 적자를 면치 못했다. 99년에야 처음으로 이윤이 나기 시작했으니 무려 12년간 하염없이 투자를 계속했다. 한국산업을 대표하는 반도체도, 개발도상국으로서 최초 개발한 가솔린 엔진도 10년 가까이 소득 없이 돈만 들어가는 암흑기가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좌불안석 진땀을 흘렸을 기술자들의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성공한 혁신의 이면에는 예외 없이 이런 혹독한 시련의 시간이 있다. 최근 로켓추진체를 재활용하는 혁신적 개념설계로 우주산업의 규칙을 바꾼 미국의 ‘스페이스X’도 무려 13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투자를 이어갔다.
     
    기술자들의 노력도 눈물겹지만, 그 지난한 스케일업 과정을 뒷받침해준 참을성 있는 돈, 즉 인내자본(patient captial)이 없었다면 이런 감동적인 시도 자체가 계속될 수 없었을 것이고, 한국은 여전히 봉제 인형을 수출하는 저개발국가 상태였을 것이다. 인내자본은 모든 혁신적 기술과 신산업이 싹트기 위한 탯줄이다.
     

    일론 머스크가 세운 스페이스X의 스타십 우주선 초기 모델인 SN8 로켓이 지난해 12월 미국 텍사스 보카치카 스페이스X 기지에 착륙하던 중 폭발하고 있다. SN8은 6분42초간 비행을 마치고 착륙하다 땅에 충돌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일론 머스크가 세운 스페이스X의 스타십 우주선 초기 모델인 SN8 로켓이 지난해 12월 미국 텍사스 보카치카 스페이스X 기지에 착륙하던 중 폭발하고 있다. SN8은 6분42초간 비행을 마치고 착륙하다 땅에 충돌했다. [로이터=연합뉴스]

    과거 한국산업의 기적 이면에는 나름의 인내자본이 있었다. 계열사 간에 자금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정부도 해외차관과 은행저축을 선택적으로 몰아주었다. 심지어 국민도 애국심 하나로 비싼 국산품을 사주면서 신산업이 버틸 수 있도록 인내자본을 제공했다. 그러나 모두 지나간 이야기다. 추격의 시대에는 선진국의 앞서간 발자취를 참조하여 추격하기 좋은 산업을 선택한 후 국가적으로 자원을 몰아갈 수 있었지만, 이미 그 단계를 지났다. 이제 선진국과 같은 눈높이에서 누구도 답을 알지 못하는 혁신적 개념설계에 도전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불확실성과 시행착오를 뚫고 나가야 하니 지금만큼 인내자본이 절실한 때가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의 혁신생태계에서 인내자본의 원천이 마르고 있다.
     
    가장 확실한 인내자본은 당연히 기업이 스스로 번 돈이다. 그러나 최근 영미식 주주자본주의의 득세로 자사주 매입과 배당 확대 등 이익분배가 강화되면서 장기적 투자 여력은 쪼그라들고 있다. 자사주를 매입하고 소각하면 경영진과 대주주들은 혜택을 보지만, 그 대가로 새로운 기술에 도전하는 프로젝트들은 재검토 대상이 된다. 배당도 마찬가지다. 2020년 상장사 전체로 총 34조원이 넘는 배당을 했고, 주가 대비 배당 비율은 이미 미국·프랑스·중국의 수준을 넘어섰다. 배당금액의 40%인 14조는 단기투자 성향이 높은 외국인 투자자의 주머니로 들어가 해외로 빠져나갔다.
     

    일론 머스크

    일론 머스크

    도전적인 미래투자의 위험을 분산시켜주는 것이 금융의 본래 역할인데, 어느덧 주객이 전도되어 금융의 단기적 이익추구 논리가 실물의 혁신투자를 옥죄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진정한 주주친화정책은 새로운 기술혁신을 위해 끈질기게 투자하면서 기업의 본원적 가치를 올리는 것이지 내년에 심어야 할 씨감자마저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주로 주식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영미식 체제와 달리 한국은 은행이 인내자본의 주된 조달창구였다. 그러나 2800조원이 넘는 자산을 가진 국내 시중 은행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비판이 적지 않다. IMF 통계자료로 계산해보면 은행권 대출 가운데 기업대출의 비율은 영미권 국가를 제외하면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낮고, G7 국가와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은행 수익의 80% 이상을 안전한 이자 수익에 의존하고 있는 현재의 관행에서는 적극적으로 위험을 분담하는 인내자본을 기대할 수 없다. 은행이 기업의 혁신적 프로젝트를 평가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니 손쉬운 가계대출로 눈을 돌리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실리콘밸리를 모범 삼아 벤처캐피탈이 인내자본의 한 축으로 등장했다. 작년 한 해 동안만 4조3000억이 투자되어 성장세를 자랑하지만, 아직 인내자본이라고 불리기에는 갈 길이 멀다. 선진국 벤처캐피탈과 비교하면 펀드의 존속기간이 7년 내외로 짧고, 그것도 단기회수를 목표로 한 투자가 많다. 벤처 붐 덕에 우수한 인력들이 투자심사역으로 유입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기술의 잠재력을 평가할 역량과 경험이 충분하지 않아 유망하다는 분야에 남 따라 투자하는 쏠림현상도 반복되고 있다. 구글벤처스나 GE 벤처서와 같이 대기업의 자금을 벤처기업 성장의 마중물로 끌어낼 수 있는 기업벤처캐피탈(CVC)도 여러 가지 제도적 장벽과 대기업의 확장에 대한 부정적 인식 탓에 큰 역할을 못 하고 있다.
     

    주요 해외·국내 은행 수익구조

    주요 해외·국내 은행 수익구조

    인내자본을 확보하는 것만큼 국가의 역할이 긴요한 분야가 없다. 도전적 기술일수록 이익이 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실패의 위험도 크다. 따라서 민간 금융시장의 의사결정에만 기댈 경우 인내자본은 항상 국가가 필요로하는 수준보다 적게 공급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시장의 실패가 발생하는 대표적인 영역이다. 모든 선진국이 인내자본이 충분히 공급되도록 금융제도를 정비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막대한 공적재원을 직접 투입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오늘날 글로벌 기술기업들이 내어놓는 혁신적 개념설계들은 대부분 여러 가지 형태의 공적 인내자본을 모판 삼아 탄생한 것들이다. GPS와 인터넷, 인공지능 비서 시리, 터치스크린 같은 애플 아이폰의 핵심기술들은 40년 이상 미국 정부가 연구개발지원 등 인내자본을 투자해서 싹틔운 기술들이다. 스페이스X의 스케일업 과정에서도 미국 정부의 조달계약이 인내자본으로서 결정적인 구명줄 역할을 했다. 선진국뿐만 아니다. 중국은 정부의 직접적인 재정지원뿐 아니라 공상은행 등 국영은행의 자금과 정부조달의 힘을 총동원하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인내자본의 화수분 역할을 노골적으로 자임하고 있다.
     
    한국 산업의 인내자본을 위해 국가적으로 가다듬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우선 제도적으로 인내자본이 커지도록 금융환경을 만드는 일부터 시급하다. 주식시장에서 단기적 이익 배분이 아니라 장기적 혁신에 투자하는 것이 더 이익이 나도록 장기보유에 대한 인센티브를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또한 은행권으로부터도 혁신기업에 더 많은 인내자본이 흘러들도록 제도를 다듬어야 한다. 금융당국의 은행평가 기준을 은행이 제공한 인내자본의 규모와 연계하는 일도 그중의 하나다.
     
    우리나라 벤처투자 생태계에서 정부 자금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단기적인 정책 성과에 대한 압력 때문에 정부 투자분마저 인내자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최소한 정부 지원이 들어간 경우에는 더 도전적인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더 오래 버티도록 정책성과 평가의 기준과 행동 가이드라인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제도뿐 아니라 국가는 국민의 세금으로 이미 막대한 인내자본을 직접 투자하고 있기도 하다. 연구개발 보조금을 주고, 산업은행을 통해 정책금융을 제공하며, 기술력을 담보로 은행보증을 대신 서주기도 한다. 최근의 뉴딜펀드처럼 정책펀드를 조성하기도 한다. 혁신기업의 제품을 직접 구매해서 매출을 지원해주는 공공조달도 인내자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부가 어떤 형식으로든 인내자본을 공급할 때는 국민을 대리하여 한국의 미래기술에 대한 비전을 명확히 하고, 금방 돈이 되는 기술이 아니라 미래 혁신기술의 옵션을 많이 만들어내는 데 집중해야 한다. 정부가 민간 전문가와 넓고 깊게 소통하고 공부하면서 더 스마트해져야 하는 이유다.
     
    영국 정부는 2017년 산업계와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인내자본 리뷰(Patient Capital Review)’를 발표하고 인내자본을 늘리기 위한 종합적인 국가대책을 내놓은 바 있다. 우리도 늦지 않게 산업계와 정치권, 정부가 합심하여 한국 혁신생태계의 인내자본 현실을 진단하고 국가적인 대책을 만들 때다.
     
    기술혁신의 과정은 오아시스가 있으리라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기약 없이 사막을 헤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인내자본이라는 생명수가 없으면 아무도 사막을 건너지 못한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Source link

    신고하기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