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인간관계 돈독하게 하는 ‘미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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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막내아들이 중2때의 일이다. 외국인학교에서 오라는 통보를 받고 긴장하며 교장실을 찾아갔다. 170cm 키에 몸무게가 80kg인 아들이 같은 반 학생을 밀쳐서 친구가 넘어졌는데, 부모가 이를 문제 삼은 것이었다. 주먹질을 해서 때린 것은 아니어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자식의 선생 앞에 부모는 모두 겸손해지고, 자식의 잘못은 모두 부모의 잘못이 된다.
     

    기숙사 형님 양복·구두 훔쳐
    영화 본뒤 맞을 각오로 고백
    형님 “잘했다 거기 벗어놔라”
    ‘정’, 질서 세우는 성숙한 문화

    나는 아들과 학교 앞 벤치에 함께 앉아 처음으로 진지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얘야. 너의 아버지는 백인이지만 사실 서양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앵글로색슨의 영향을 받은 영국과 미국은 규칙을 가장 중요시한다. 그러나 나는 어린 나이에 전라도에서 배운 인간관계가 규칙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전라도 온돌방 아랫목에서 수없이 들어왔던 것으로 나의 기본 철학이었다.
     
    아들에게 “학교의 친구들과 헤어지고 싶으냐?”고 물으니 아들은 “아버지 그러면 절대 안 돼요. 큰일 나요”라고 말했다. 나는 “얘야. 친구들과 헤어지지 않고 친구와 함께하기 위해서 이 사람들이 강조하는 학교의 규칙을 지킬 수밖에 없다. 친구를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겠니?” 내가 그 나이 때의 가치관을 떠올리며 아들과 대화했다. 이 일 이후로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아무 사고도 없었고 아들과의 소통도 잘 되었다. 인간관계가 어떤 규칙이나 법보다 더 중요하다는 삶의 방식은 내가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소중한 문화다. 그러던 어느 날, 유진벨 재단의 형님이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한국의 많은 가치관이 변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형님 말에 잠깐 패닉상태에 빠졌지만 담담하게 형님에게 답했다. “형님. 나와 이 소중한 가치관을 공유한 사람들이 나와 함께 살아왔고 나와 함께 나이 먹고 있습니다. 최소한 내가 죽기 전까지는 한국의 소중한 가치관이 잘 유지되지 않겠어요?” 형님과 대화 중에 내가 아들처럼 외국인학교에 다니던 중학교 2학년 시절의 일이 생각났다.
     
    내가 다닌 대전 외국인학교 기숙사는 육사처럼 규율이 엄했다. 학생들이 지켜야 할 규칙들이 A4용지에 작은 글씨로 4페이지에 달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나는 어린 시절 순천의 동네 아이들과 뛰어놀던 자유가 늘 그리웠다. 부모가 그리웠던 시간은 한번도 없었지만 순천의 친구들이 그리워 잠자리에서 눈물도 참 많이 흘렸다. 기숙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서양 사람들이 정해놓은 규칙 때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친구에게 치약을 한번 얻어 쓰려고 해도 하나하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전라도에서 내 것과 네 것을 함께 공유하고 나눠 쓰며 자란 나는 이러한 서양의 문화가 큰 스트레스였다. 그렇게 기숙사 생활에 힘들어하던 나에게 큰 위로가 되는 사건이 있었다. 고등학교 상급생 중에 최기호라는 한국인 형님이 있었는데, 나는 최기호 형님을 무서워하기도 하고 형으로서 좋아하기도 했다. 외국인학교에서의 유일한 낙은 주말에 대전시에 나가 ‘007’ 같은 영화를 한 편 보고 들어오는 것이었는데, 그날은 내가 기호 형님 몰래 형님의 양복을 입고 형님의 멋있는 뾰족구두까지 신고  나가서 영화도 보고 신나게 놀았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엄청 무거웠다. 형님에게 허락도 안 받고 양복에 구두까지 몰래 훔쳐 신었으니 그 죄가 컸기 때문이었다. 기숙사에 돌아와 형님 방에 들어갔다. 형님은 미적분 문제를 풀고 있었고 나는 조용히 고백했다. “형님! 형님의 양복을 몰래 훔쳐 입고 영화 한 편 보고 들어왔습니다.” 기호 형님은 날 쳐다보지도 않고 “잘했다. 거기다 벗어놔라”라고 했다. 내가 구두도 훔쳐 신었다고 고백했더니 형님은 또 “잘했다. 거기 벗어놔라”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맞을 각오까지 했는데 말이다. 일평생 한국인과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다.
     
    사람이 중요한가. 규칙이 중요한가. 사람이 규칙을 위해 있는가. 규칙이 사람을 위해 있는가. 한국에는 서양에 없는 ‘미운 정’이 있다. 미워도, 고생을 해도, 손해를 봐도 마음에 존재하는 것이 한국인의 ‘미운 정’이다. 서양에서는 규칙으로 질서를 세운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정’으로 인간관계의 질서를 세우고 더욱 돈독하게 유지된다는 것을 한국에서 경험하며 살아왔다. 이런 ‘미운 정’을 어떻게 외국인에게 설명하겠는가. 물론 ‘미운 정’ 때문에 피해 보는 일들도 있겠지만 나는 이 ‘정’ 때문에 60년 한국에서 살아왔고 한국의 ‘정’을 서양 문화보다 더 성경적이고 더 성숙한 문화라고 확신한다.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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