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지혜로운 자는 말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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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과 교수

    흔히 듣게 되는 ‘칼보다 무서운 펜’이라는 말이 있다. 말 한마디로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그 무게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말하지 않는 자는 지혜롭다”
    ‘칼’보다 무서운 ‘말’의 힘
    지킬 마음 없인 약속하지 말라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은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언어학자들 가운데에서도 화행론(話行論)자들은 말이 가지는 행동력, 즉 말로 표현하게 됨으로써 그에 수반되는 힘과 효력을 연구대상으로 한다. 쉬운 예로 ‘약속하다’라는 말이 있다면, 이 말은 그 약속이 지켜지는 효력을 전제로 한다. ‘성혼을 선포한다’라고 말하면, 그 말을 할 수 있는 권위가 부여된 위치의 사람이 그렇게 선언함으로써 혼인의 효력이 발생되도록 한다.
     
    독일 유학생활에서 얻은 몇 가지 경험 중 유독 말의 힘을 진중하게 느끼게 되는 경우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약속을 언급하는 것은 대단히 신중하면서도 힘을 가지는 것으로 보였다. 독일인들 사이에서 약속의 의미로 발화된 것은 ‘지키겠다’는 의도와 ‘지켜질 것’이라는 기대가 전제되므로 꽤나 무게감을 가진다. 때문에 아예 지킬 의지나 의도가 없다면 약속이란 말조차 꺼내지 않아야 한다. ‘하지도 않을 것’이면서 ‘하겠노라’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별생각 없이 ‘밥이나 한번 먹읍시다’ 라던가 ‘조만간 한번 뵙지요’ 등의 약속 아닌 약속을 남발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지켜지리라’는 믿음 혹은 ‘지키겠다’는 의지도 없이, 우리에게는 이런 ‘빈말’들이 체면치레나 격식에 가까운 인사말로 건네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때문에 이런 ‘약속’들이 가벼운 말치레가 되어버린 지금, 우리는 그 약속이 의미하는 실제 말의 힘과 단순히 가볍게 오가는 인사말 사이에 벌어져 있는 의미의 간극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아’로 말하고 ‘어’로 들어야 하는 절묘한 언어행위가 지어내는 행간을 읽고, 무언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재주와 함께, 하나를 말해도 둘로 알아들어야 하는 초인적 능력도 함께 발휘해야 한다. 어찌 보면 말이 지니는 힘, 그 무게가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기능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지극히 사적으로 들리는 이런 말치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곳곳에는 크고 작은 공공의 약속들이 있다. 이들은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위해서 서로에게 암묵적으로 지켜질 것을 전제로 작동한다. 아스팔트 위에 그어진 노란 선 하나도 하나의 약속이고,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혹은 건널목 앞에서 하염없이 바라보는 신호등의 삼색도 하나의 약속이다. 참으로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여 그것이 약속이었다는 것조차 잊고 살지언정, 그 의미를 곱씹어 보면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수많은 약속들이 지켜질 것을 기대하면서 도처에 산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언젠가 들었던 “대통령이 되고자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국민들과의 공식적인 약속인 ‘공약’도 가볍게 넘길 수 있다”는 말은, 우리가 가지는 약속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지켜질 의도에 대한 전제는 행간에 묻어두고, 가벼운 말치레가 되어버린 약속의 본뜻을 헤아리면서, 함부로 내뱉은 말들 사이에서 맥없이 시들어버리는 ‘말의 힘’이 새삼스럽다.
     
    우리는 곧잘 ‘언어가 없다면 생각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과연 우리는 입 밖으로 쏟아내는 말들에 어떤 생각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일까? 혹은 우리가 하는 말들이 가늠키 어려운 ‘생각의 생각’이라는 심오한 의중의 복선을 깔고 있기에, 오히려 가벼운 겉치레처럼 포장되어야 하는 것이었을까?
     
    우리는 언어가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많은 종교들에서 행하는 가장 고통스런 수행 가운데 하나가 ‘묵언수행’이다. 그만큼 한번 말을 하는 능력을 갖게 되면, 그것을 덜어내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과도 같은 무게감을 가진다. 그럼에도 한없이 가벼워진 말치레들은 때로는 삶을 지탱하는 믿음의 무게 또한 가벼이 여겨도 좋다는 신호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어떤 말들은 해도 탈이고 안 해도 탈일진대, 김성도의 『언어인간학』에서 언급된 언어에 대한 석학들의 견해가 다채롭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를 비롯하여, 보들레르는 “언어, 단 한마디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수 있는 사건”이라 했고, 프로이트에게 “언어는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무기”였다. 반면, 생텍쥐페리에게 “언어는 온갖 오해의 근원”이었고,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혜로운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지혜롭지 못하다.” 여기에 “내 언어의 한계는 곧 내 세계의 한계”라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한마디가 긴 여운을 남긴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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