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심미적 정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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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운 스타일의 예식이 필요한 이유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저 자의 목을 쳐라!” 세상에 여러 악연이 있겠지만, 목을 베는 사람과 목이 베이는 사람 간의 악연만한 것도 드물다. 저 사람을 딱히 미워할 것도 없는데, 망나니는 이제 눈앞에 있는 사람 목을 쳐야 한다. 죽을 사람은 망나니가 직업상 할 수 없이 자기 목을 베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망나니를 좋아하기는 어렵다. 목 베인 이의 자식이 그 망나니를 길에서 마주치면 어떨까. 과연 아무 감정 없이 지나칠 수 있을까. 이 원한은 대를 이어 지속된다.
     

    과정을 공정하게 관리하면
    정의로운 사회에 도달되듯
    품위 갖춘 스타일과 행동이
    비천한 현실, 심미적 고양시켜

    정작 목을 치게끔 만든 권력자는 자기 손에 피를 묻히는 대신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 목을 치는 것 같은 비천한 일은 망나니에게 ‘외주’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현대에도 비일비재하다. 수십 년 전 군사 정권 타도를 위해 거리에 나온 시민들은 전경들과 마주하여 화염병을 던졌고, 전경들은 최루탄을 쏘며 그 시민들을 진압했다. 전경들은 의무 복무규정 때문에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사람들이므로 시민들을 미워해야 할 이유 같은 것은 원래 없었다. 그러나 정작 화염병이 날아오고 최루탄이 터지면, 현장의 시민들과 전경들은 서로를 미워하게 된다. 정작 그 사태를 초래한 주요 당사자는 어딘가 안락의자에 앉아 양주를 마시고 있을지라도.
     
    중세 유럽의 망나니는 욕과 저주를 퍼부으면서 죄수의 목을 쳤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중세에는 참수당하는 사람과 망나니가 마주한 그 비천한 현실을 완화하기 위하여 만든 장치가 존재했다. 망나니는 칼을 휘두르기 전에 사형수에게 먼저 용서를 구한다. 사적 감정은 없으나 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자기 처지에 대해 양해를 구하는 것이다. 그다음, 사형수는 망나니의 일을 양해한다는 표시를 한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사형수 중에는 망나니에게 키스를 요청한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예식을 통해 자칫 증오와 혐오로 얼룩질 수 있는 비천한 장면이 좀 더 견딜만한 장면으로 고양된다. 비루해지기 쉬운 인간 현실이 예식을 통해 조금이나마 완화되는 것이다.
     
    인간 현실이란 실로 비천하지 않은가. 예나 지금이나 세계는 자칫하면 폭력과 혐오와 질병과 반목으로 가득한 지옥으로 변한다. 중세의 시인 장 메쉬노(Jean Meschinot)는 노래한다. “아, 비참하고 서글픈 인생이여. 전쟁과 죽음과 기근이 그칠 줄 모르고, 추위와 더위와 낮과 밤이 우리를 쇠약하게 만든다.” 네덜란드의 역사가 하위징아에 따르면, 비천한 현실에 대해서 인간은 세 가지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첫째, 이 괴로운 세상을 외면하고 내세를 기대하는 것이다. 현생은 괴롭지만, 사후에 도래할 세계는 천국일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다행이겠지만, 내세를 믿지 않는 이는 어쩌란 말인가. 그런 사람에게는 두 번째 선택지가 있다. 이 비천한 세상을 변혁해보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에 바로 지금 이곳을 개선하자. 그러나 변혁의 의지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강철같은 의지로 세상에 맞설 수 있다면 가상하겠지만, 의지가 박약한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그런 사람에게는 남은 선택지가 하나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꿈을 꾸는 일이다.
     
    자면서 꾸는 악몽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지만, 깨어 있을 때는 삶의 환경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채색하고 그 채색을 통해 피어난 환상을 누릴 수 있다. 자포자기에 이르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더럽게 방치하지 않는 법. 부자는 부자대로 자신의 일상을 아름답게 치장하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자신과 주변을 치장한다. 많은 이들이 창문 가에 작은 화분을 놓아 자신의 세계에 깃든 아름다움을 누리고 싶어한다. 독일 가수 헤베르트 그뢴네마이야는 노래한다. “꽃 없는 창문이여, 보고 들을 것 없는 창문이여, 나는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네.” 19세기 영국의 문인 토머스 칼라일에 따르면, 굶주림을 면한 원시인이 품은 첫 번째 소망은 안락이 아니라 치장이었다. 세계를 변혁할 역량이 없을 때는, 치장을 통해 환상이라도 가져보는 것이 인간이다.
     
    많은 이들이 정치판을 암투와 모략이 판치는 비천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하긴, 삶이 대체로 비천할진대, 정치라고 예외일 수 있겠는가. 우크라이나 국회에서 발생한 주먹다짐이 해외 토픽으로 보도된다. “경고합니다! 의원들의 머리를 깨부수고 불구로 만들던 시대는 갔어요”라고 소리 질러도 국회의원들은 주먹질을 그칠 줄 모른다. 이것이 먼 나라 일만은 아니다. 대만 국회의원들도 돼지 내장을 상대에게 던져 가며 난투극을 벌인 바 있고, 우리나라 국회의 역사에서도 의원들이 오물을 투척하거나 몸싸움을 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얼마 전에는 잠재적 대선 후보의 조상 묘역을 파헤치고 음식 찌꺼기, 똥, 식칼, 부적 등을 묻거나 놓아두는 일이 발생했다. 매흉(埋凶)이라고 불린 이러한 저주성 테러는 옛 정치판부터 흔히 존재해 왔다.
     
    더러운 세속의 정치를 외면하고 싶겠지만, 복수의 인간이 사는 곳에서 정치는 불가피하다. 정치를 외면하는 것은 세속의 삶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쿠데타는 하루아침에 일어나도, 세속의 정치는 하루아침에 개선되지 않는다. 많은 퇴보와 갈지자걸음을 거쳐 아주 조금씩 전진한다. 그 느리고 비천한 과정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그 답답한 과정을 견디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예식을 통해 꿈을 꾸는 일이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격렬히 충돌하는 지점에 심미적 형식을 부여하여 자칫 비천해질 수 있는 정치 과정을 고양하는 것이다.
     
    과거의 정치에서 전쟁 다음으로 혹은 전쟁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이 궁정 의례였다. 그 의례의 집행을 위해서는 평상복과는 다른 의례복이 필요하다. 실로 인간은 허기를 면하기 위해서만 음식을 먹고, 추위를 막기 위해서만 옷을 입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치장하기 위해, 아름다운 꿈을 연기하기 위해 옷을 입는다. 집에서는 속옷 바람으로 누워 옹알이를 하던 사람일지라도, 선생으로서 교단에 오를 때만큼은 정갈한 옷차림을 하고 말쑥한 사람을 연기한다. 교단에 오르는 일은 잠시나마 배움의 무대에서 함께 꿈을 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국회의원이 등원할 때, 되도록 정장을 입는 것은 비천한 꼬락서니를 넘어서 어떤 멀쩡한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서다. 정갈한 옷은 정갈한 언행을 하도록 영향을 행사하고, 그 정갈한 언행이 모여 말싸움이 아닌 토론이 이루어진다면, 인간은 원숭이 이상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현재 국회의원들이 즐겨 입는 정장은, 그간 그 옷을 입고 자행한 막말과 몸싸움 때문에 그 광휘를 잃은 상태이지만, 한때는 그것 나름대로 비천한 현실의 미학적 고양을 위해 고안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정장을 입고도 무례를 일삼을 때, 사람들은 분노한다. 우리의 삶이 고상하다는 환상을 깨뜨리고, 결국 비천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정장에 도전하는 스타일이 생겨난다. 18년 전 유시민 전 의원의 백바지, 1년 전 류호정 의원의 원피스, 올해 이준석 대표의 자전거처럼. 이처럼 다음 세대의 정치는 새로운 정책이나 이념으로 발전하기 이전에 일견 새로운 스타일로 먼저 등장할 때가 있다. 한갓 외양에 불과한 일이라 할지라도, 스타일의 갱신도 아무나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갑자기 막춤을 추거나, 터진 청바지를 입거나, 거리의 패션을 흉내 내거나, 막말을 해댄다고 해서, 새로운 스타일이 창출되지는 않는다. “이 세상에 대하여 절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화려한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정신은 엄격하게 형식화된 행동의 도움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진리가 무엇인지 아무도 미리 확신할 수 없을 때, 이성적인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은 과학적인 과정이다. 탐구 과정을 엄정하게 관리하고 집행했을 때 결국 이르게 되는 상태가 진리라고 보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가 무엇인지 미리 확고하게 정의할 수 없을 때, 시민들이 의지하는 것은 공정한 과정이다. 과정을 공정하게 관리하고 집행했을 때 결국 이르게 되는 상태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보는 것이다. 아름다운 정치가 무엇인지 아무도 확고하게 말할 수 없을 때, 정치인들이 일단 의지해 볼 수 있는 것은 심미적인 과정이다. 품위를 갖춘 스타일과 행동과 발화의 누적을 통해 결국 도달하게 되는 것이 더럽지 않은 정치라고 보는 것이다.
     
    예식을 통해 혁명을 달성할 수는 없겠지만, 정치를 살짝 고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세상을 변혁할 수 없으면, 스타일이라도 갱신하고, 스타일을 갱신할 수 없으면, 일단 잘 씻고 다니자.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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