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이 정도면 딱 좋다고 생각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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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국 사회2팀 기자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야. 이렇게 백신도 놓아주고.”
     
    얀센 백신을 맞으러 간 지난달, 병원 소파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말했다. 백신을 맞고 대기하던 청년이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을 때 진료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주사를 맞은 나도 15분간 로비에서 대기했다.
     
    내과 병원엔 백신 접종자 외에 아파서 찾은 이들도 있었다. 통증 때문인지 인상을 쓰고 있던 50대 중년 남성이 그랬다. 그가 진료실을 나오자 “혈액종합검사를 준비해달라”는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비용을 물었다. 15만원이란다. 찡그린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그 정도 돈이 없다”는 그의 중얼거림은 병원 모두가 들을 정도였다. 망설임을 본 간호사는 “카드로 내도 되고, 오늘 어려우면 내일 와도 된다”고 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카드로도 어렵다”며 "다음에 와서 검사받겠다”고 했다. 내일이나 모레라고 특정하진 못했다. 그는 진료비 4900원을 계산하기 위해 카드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의 크고 두꺼운 손이 눈에 띄었다. 곳곳에 굳은살과 상처가 보였다.
     

    4년 전 취재한 노인은 하루 3600원을 번다고 했다. [연합뉴스]

    4년 전 취재한 노인은 하루 3600원을 번다고 했다. [연합뉴스]

    15만원은 내게도 적은 돈은 아니다. 다만 아파서 병원에 갔고, 고통의 원인을 알기 위한 검사비라면 카드로 냈을 돈이다. 최근 읽은 『별것 아닌 선의』란 책에서 저자 이소영 교수는 “‘이 정도면 딱 좋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바로 그대가 보수화되는 시작점”이란 글귀를 읽고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썼다.
     
    실은 병원에 있던 할머니가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라고 할 때 건너편에 있던 나도 “맞아 이 정도면 좋지”라고 생각했고, 이 생각은 대체로 변함없다. 다만 검사 예약을 못 하고 병원을 나간 이를 보며 ‘이 정도면 좋다’는 말 뒤엔 ‘알지 못한 수많은 삶이 있겠구나. 내가 아는 것이 전부는 아니겠구나’ 싶었다.
     
    4년 전 여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노량진에서 폐지를 줍는 70대 할머니를 취재할 때다. 할머니는 자신의 덩치보다 큰 침대 포장 박스를 끌고 접고 들었다. 그렇게 1㎏당 120원, 하루 3600원쯤 번다고 했다.  
     
    그날 할머니의 낡은 주황색 티셔츠는 땀에 잔뜩 젖어있었다. 카페에 들어가 부랴부랴 마감한 뒤 한숨 돌리고 보니 무심하게 들이켠 커피가 3600원이었다. 매일 먹는 커피가 그날 유독 생경하게 느껴졌다.
     
    온종일 일해 3600원을 버는 삶과 15만원 때문에 고통을 참는 이들이 곁에 있다. 이런 가난과 삶에 대해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정도면 딱 좋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내가 알지 못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 도처에 있음을, 이들이 내 이웃이라는 걸 다시금 떠올리려 한다.
     
    백신을 맞은 지 3주가 지났다. 주변에서 백신을 맞으러 간다 할 때면 쓸쓸하게 병원을 나서던 그가 떠오른다. 그는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을까.

    여성국 사회2팀 기자 yu.sungk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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